역사속 오늘

美·日, 수호통상조약 조인… 日 에도막부 몰락의 시작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 에도(도쿄)만에 출현해 개항을 압박하던 1853년 7월 경의 일본은 쇼군(將軍)이 천황을 제치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에도막부 시대였다. 병약한 쇼군으로부터 정무 일체를 위임받은 아베 마사히로는 갑작스런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라 막부 정권의 오랜 관례를 깨고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천황가 조정에 의견을 구했다. 막부 정권으로서는 스스로의 권위를 무너뜨린 자충수였고, 천황가 조정으로서는 권위를 되살릴 절호의 기회였다.

이듬해 3월 천황가(家)가 침묵하는 가운데 에도막부는 결국 굴욕적인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2개 항이 개항하고,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이로써 250여 년간 이어온 에도막부의 강력한 쇄국정책이 끝내 수포로 돌아갔고, 막부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1856년 미국이 한발 더 나아가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을 때 막부정권의 아베는 고메이(孝明) 천황의 허락을 구했으나 ‘양이(攘夷)’를 내세운 천황가의 조정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아베가 조약을 체결하기도 전에 병사하자 1858년 4월 막부정권은 이이 나오스케로 하여금 조약을 추진하도록 했다.

이이는 천황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1858년 6월 1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체결이 부당하다는 반발에도 이이는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 결과적으로 노쇠한 막부의 몰락을 재촉했다. 막부의 무능과 약화를 틈타 고메이 천황은 조약 체결에 불만을 표시하는 칙령을 내리고, 막부 영향 하에 있던 지방의 각 번은 천황의 복권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내세워 굴욕적 불평등 조약에 반기를 들었다. 이이는 반대세력을 잡아들였으나 반작용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이이가 에도성 성곽의 사쿠라다문 근처에서 1860년 3월 미도번의 무사들에게 피살되자 기세가 오른 천황 세력은 ‘에도막부 타도’를 외치며 막부를 압박해 들어갔다. 막부 앞에는 몰락의 수순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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