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경북 봉화 청량산]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여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주세붕 曰)

↑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봉우리들

 

by 김지지

 

☞ 거리는 7.11㎞에 시간은 4시간 30분

☞ 입석(들머리) →(2.3㎞)← 자소봉 →(1.2㎞)← 하늘다리 →(0.8㎞)← 장인봉 →(1.5㎞)← 청량사 →(1.3㎞)← 입석(원점회귀)

 

■ 청량산(淸凉山)은 이런 산

 

100대 名山(명산), 국가지정문화재 名勝地(명승지)

오늘 산행지는 경북 봉화의 청량산이다. 2020년 11월 6일, 내자(內子)와 아들이 함께 했다. 서울서 출발한 시간은 6시 40분이고 들머리인 입석에서 산행을 시작한 것은 11시 15분이다. 청량산(淸凉山)은 산림청과 블랙야크 모두 100대 명산으로 분류하고,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23호로 지정한 명산이다. 기암 봉우리와 수려한 산세야말로 청량산의 자랑인데 보통 명산들은 자연절경으로만 인정을 받지만 청량산은 자연풍광에 역사적 스토리까지 더해져 얘깃거리가 풍부하다.

신라시대에는 원효대사, 김생, 최치원이, 고려 때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조선시대에는 주세붕과 이황 등이 흔적이나 기록을 남겼다. 문사들이 청량산을 탐승하며 쓴 유람기만 해도 100여 편에 이르고 시 또한 600수가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주세붕은 청량산을 보고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여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고 썼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엄숙하고 기이하며 험준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청량산 봉우리들이름

 

퇴계 이황에게 청량산은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

누구보다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던 이는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 칭했다. ‘우리 집안의 산’이라는 뜻인데 이유가 있다. 퇴계의 5대조 이자수가 송안군으로 책봉되면서 나라에서 하사받은 산이 청량산이기 때문이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봇짐을 메고 청량산을 왕래하며 독서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주세붕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발문에 썼다.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서는 선비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종종 말하기도 했다. 이런 퇴계에게 청량산은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었다. 50대에는 스스로를 ‘청량산인’으로 불렀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컸다.

청량산은 자연경관으로도 손꼽히는 암봉 명산이다. 규모가 작은데도 생김새가 다양한 암봉들이 오밀조밀 몸을 비비고 들어앉아 있다. ‘6·6봉, 12대, 3굴’은 청량산의 자랑이다. ‘6·6봉’이란 산 중심의 청량사에서 바라보이는 9개 봉우리와 그 바깥쪽 3개 봉우리를 합한 12개봉을 말한다.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 축융·경일·선학·금탑·자소·자란·연화·연적·향로·탁필·탁립봉 등이다. 한결같이 절경이다. 절벽을 뜻하는 12대는 어풍·밀성·풍혈·학소·금강·원효·반야·만월·자비·청풍·송풍·의상대를 일컫는다.

청량산은 신비감 넘치는 산세 때문인지 종교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고려 때 사찰이나 암자가 27개나 있고 12개 봉우리들의 명칭도 보살봉, 의상봉, 반야봉, 문수봉, 원효봉처럼 불교식이었을 만큼 불가의 산이었다. 그러다가 1544년(중종 39) 풍기군수 주세붕이 청량산을 찾아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일부는 고치고 일부는 새로 지어 불가의 산에서 유가의 산으로 바꾸었다. 퇴계는 주세붕이 명명한 열두 봉을 ‘청량산 육육봉’이라 부르며 주자의 중국 무이산 육육봉과 연결시켜 청량산을 조선의 무이산으로 삼았다.

청량산 지도

 

■ 주요 산행 들머리

 

청량산으로 진입하려면 3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낙동강 지류 위에 놓인 청량교를 건너야 한다. 과거 등산객이 많을 때는 청량교를 건너기 전 대형주차장에 주차할 때가 많았다. 주차장 부근에는 공원관리사무소, 청량산박물관, 민박·식당 등 집단시설지구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에는 등산객을 실어나르는 관광버스나 산악회 버스가 사실상 멈춰버려 이제는 청량산 도로를 타고 계곡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도 주차공간에 여유가 있다. 물론 계절과 요일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청량교를 건너면 커다란 8각 기둥 위에 한자로 ‘淸凉之門(청량지문)’이라고 크게 쓰고 지붕은 기와로 덮은 도립공원 일주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오른쪽이 낙동강 지류와 합류하는 청량계곡이고 왼쪽이 1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다.

등산객들이 주로 산행하는 주요 들머리는 세 곳이다. 하나는 초입의 탐방안내소에서 장인봉 쪽으로 올라가는 급경사길, 또 하나는 탐방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한 선학정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청량사까지 올라갔다가 왼쪽 장인봉이나 오른쪽 자소봉으로 올라가는 길, 또 다른 하나는 공원 끝자락에 위치한 입석에서 출발해 응진전과 어풍대 그리고 자소봉(혹은 경일봉)을 거쳐 장인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중 가장 일반적이고 인기있는 코스는 입석 코스다. 청량산 전체를 느끼려면 탐방안내소~장인봉~경일봉~오마도터널(청량계곡 북쪽)~축융봉(청량계곡 우측)을 4각 축으로 삼아 원형 코스를 돌아야 하나 거리가 13㎞에 10시간이나 걸려 간단치 않다. 그래도 궁금하다면 해가 긴 늦봄이나 여름에 도전할 만한 하다.

청량산 일주문

 

■ 우리는 이렇게 올라갔다

 

거대 암릉으로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웅장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해

우리는 입석에서 출발해 자소봉으로 올라가 하늘다리와 최고봉인 장인봉을 거쳐 청량사로 하산해 입석으로 원점회귀했다. 구체적으로는 입석 → 응진전 → 어풍대  → 김생굴 → 자소봉 → 뒷실고개 → 하늘다리 → 장인봉 → 하늘다리 → 뒷실고개 → 청량사 → 입석 코스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축융봉까지 올라가고 싶었으나 현지에 도착해보니 택도 없는 꿈이었음을 알게되었다.

출발에 앞서 지도상으로 살펴본 청량산 도립공원은 거대한 암릉처럼 보였는데 막상 가보니 웅장한 느낌은 들지 않고 오히려 아기자기한 편이다. 코로나에 평일이어서 도로와 계곡 사이에 드문드문 있는 20~30대 정도의 주차공간은 대부분 비어있다. 다만 입석 부근의 주차장만은 만차여서 부근 길가에 주차해야 했다. 버스는 코로나 때문에 아예 진입 불가다.

공원 초입에서 입석까지는 도보로 20~30분 정도 걸린다. 입석에 도착하기 전 두 곳의 들머리를 지나는데 청량폭포(→두들마을 → 장인봉)와 선학정(→청량사→장인봉 혹은 자소봉)이다. 길가에 심어놓은 가로수들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올해 단풍은 이곳에서 만끽했다. 여름이었으면 계곡의 물소리가 청량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적할 게 있다. 선학정에서 청량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한자로 ‘청량산 청량사’라고 쓰여있는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청량의 ‘량’자가 한자사전에 없는 단어다. 즉 봉화군청 홈페이지에서 청량산의 ‘량’은 이수변을 쓰는 ‘凉’인데 표지석 한자는 삼수변을 쓰고 있고 또 이수변 오른쪽의 입구(口)가 가로왈(曰)로 쓰여있다.

 

입석~응진전~금탑봉

입석은 높이와 너비가 4~5m 정도 크기의 바위다. 초입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청량사와 응진전 갈림길이다. 직진하면 청량사 1㎞, 하늘다리 2.5㎞다. 오른쪽은 응진전 0.6㎞, 김생굴 1.1㎞, 자소봉 2.0㎞다. 우리는 예정대로 오른쪽 응진전으로 향했다. 김생굴을 거쳐 자소봉으로 올라가는 코스다. 청량사는 하산 길에 들를 예정이다.

입석 들머리

 

갈림길에서 응진전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금탑봉(620m)이 우뚝 서있고, 그 아래에 응진전이 자리잡고 있다. 응진전은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청량사를 창건할 때 함께 창건한 암자로 알려져 있다. 뒤로는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 절벽이다. 응진전에서 바라보는 사방의 조망이 시원하고 멋지다. 응진전에는 16나한상과 함께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가 모셔져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이곳에 피난 왔을 때 노국공주가 손수 16나한을 깎아 홍건적 퇴치와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린 곳으로 전해오기 때문이다.

금탑봉 끝지점을 올려다보면 바위 한 개가 버티고 있다. 사람이 밀어도 건들거리고 바람이 불어도 건들거리지만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의 건들바위(한자로는 動風石)다. 예전에 어떤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지으려 했다. 그런데 암봉 위에 바위가 있는 걸 보고 스님이 올라가 떨어뜨렸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그 바위가 도로 올려져 있어 절을 짓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응진전과 금탑봉. 오른쪽 사진은 응진전 옆의 감로수 바위다.

 

풍혈대~어풍대

응진전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갈림길이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100m 정도 급경사 데크 계단을 올라가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통한다는 풍혈대(風穴臺)다. 신라말 최치원(857~?)이 부근에 머물 때 독서와 바둑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막다른 곳이어서 다시 내려와야 한다. 풍혈대에서 내려와 저멀리 청량사를 왼쪽으로 내려다보며 2~3분 정도 걸어가면 깍아지른 벼랑 위에 선 어풍대(御風臺)다. 청량산 최고 조망터 중 한 곳이다. 멀리 청량사가 자리잡고 있고 그 뒤를 기암절벽이 둘러싸고 있다. 공원 측은 그 암봉들이 연꽃잎 같아 청량사가 꽃술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한다.

어풍대에서 바라보면 청량사 자리가 청량산의 기운이 모이는 기막힌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청량사 뒤로 낭떠러지 절벽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고 절벽 위에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이 우뚝 서 있다. 청량사 왼쪽으로는 연화봉이 바로 옆에 있고 연화봉 너머로 하늘다리와 청량의 최고봉인 장인봉 등이 도열해 있다. 연화봉은 산행 내내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각도와 고저를 달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연화봉은 위에서 내려다볼 때 형상이 연꽃 봉우리 모양 같다고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이름은 의상봉이었으나 주세붕이 연화봉으로 명명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풍대에서 내려다본 청량사와 연화봉(왼쪽)

 

어풍대에서 6~7분 정도 지나니 또 다시 갈림길이다. 오른쪽 산비탈로 오르면 경일봉(0.7㎞)이고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김생굴(0.1㎞)과 자소봉(1.2㎞)이다. 우리는 직진해 김생굴~자소봉으로 올라갔지만 오른편 된비알을 30분 정도 오르면 경일봉(750m)이 나온다. 경일봉에서 자소봉까지는 오르막 내리막 능선길로 40분쯤 걸리는데 능선길에 있는 바위전망대에서 청량산의 여러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다.

 

김생굴~자소봉

다시 우리 코스인 김생굴로 향한다. 중간에 돌넛덜무덤(石槨墓) 안내문이 있어 살펴보니 ‘벽이 파괴되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무덤이 조성된 시기도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안내문에서도 설명하듯이 어떤 것이 무덤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안내문을 설치한 것은 과잉 홍보이고 불필요한 행정이다.

경일봉 갈림길에서 3분 정도 걸어가면 김생굴이다. 거대한 수직 절벽 속을 파고들어간 반월형의 자연 암굴이다. 한국 서예사에 큰 획을 그은 통일신라시대 김생(711~?)이 글씨를 연마하던 장소란다. 김생은 이 굴 앞에 암자를 짓고 10여년간 글씨 공부를 한 끝에,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청량산의 글씨를 본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김생필법’을 확립했다고 한다. 왕희지체와 구양순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그들을 모방하거나 추앙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서법을 구사함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서풍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듣는다.

김생굴

 

응진전~김생굴 길을 걸을 땐 몰랐으나 나중에 건너편 축융봉에 올라가 바라보니 그 길은 천길 낭떠러지 위에 난 길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걸었다면 더 실감났을 것이다. 김생굴에서 40분 정도 올라가니 자소봉, 경일봉, 청량사, 장인봉으로 갈라지는 사거리다. 그곳에서 자소봉 방향으로 6~7분 정도 급경사 오르막길과 급경사 철계단을 오르니 마침내 자소봉(840m)이다. 입석에서 자소봉까지 거리는 2.3㎞다.

 

자소봉~탁필봉~연적봉

자소봉도 원래 이름은 보살봉이었으나 조선시대 억불정책을 펼치고 유교문화가 번창하면서 주세붕이 현재 이름으로 바꿨다. 자소봉은 청량산에서는 장인봉과 축융봉에 이어 세 번째 고봉이지만 9개 봉우리로 이뤄진 청량내산(內山)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자소봉도 막다른 곳이어서 조금 전 사거리로 다시 내려가야 하지만 조망이 워낙에 좋아 오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자소봉은 최고봉 정상이 아닌데도 사망이 탁 트여 있어 정상 같은 느낌을 준다. 청량사와 함께 청량산 2대 핵심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자소봉 정상석은 위치상 문제가 있다. 정상석 바로 뒤에 설치한 망원경이 정상표지석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마다 초대받지 않는 손님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소봉 정상 공간은 넓고 평평해 망원경을 다른 곳에 설치할 수도 있는데 정상석 바로 뒤에 설치한 것은 전형적인 공무원 발상이다. 사실 이런 곳이 자소봉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볼썽 사나은 것이 정상석 옆이나 뒤에 ‘산불조심’ ‘음주 흡연 금지’ 등을 써놓은 알록달록한 색상의 천을 걸어놓은 것이다.

자소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망원경을 통하지 않고도 동쪽으로 일월산, 서쪽으로 소백산, 남쪽으로 주왕산이 관찰된다는데 지형을 모르는 나에게는 모두가 무명봉이다. 그러나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청량계곡 건너편(남쪽) 축융봉이 양쪽으로 능선을 활짝 펼친 채 장벽처럼 우뚝 솟아 있고, 북쪽 문명산(894m) 뒤쪽 멀리로는 소백산에서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통고산에서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이 하나의 장벽을 이룬 채 활개를 치고 있다.” 풍혈대에서도 느낀 것인데 자소봉을 비롯 청량산의 각종 봉우리와 바위들의 생김이 독특하다. 꼭 시멘트에 크고작은 자갈을 섞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자소봉에서 2.1㎞ 떨어진 장인봉으로 가려면 올라왔던 급경사 철계단으로 다시 내려가 20~30m 거리에 있는 탁필봉(820m)과 연적봉(846m)을 거쳐야 한다. 탁필봉(卓筆峰)은 뾰족한 봉우리가 마치 붓끝을 모아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서, 연적봉(硯滴峰)은 이름 그대로 연적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중 유일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봉우리는 연적봉이다. 철계단을 올라 연적봉 정상에 서면 방금 전 지나온 자소봉과 탁필봉이 수묵화 속 기암처럼 보이고 사방으로 전망이 탁 트여 있다. 봉우리 자체도 암봉과 노송이 어우러져 멋진 풍치를 자아낸다.

자소봉(왼쪽)과 탁필봉

 

연적봉~하늘다리

연적봉에서 내려와 하늘다리로 가는 길은 평지길과 경사길의 반복이다. 그렇게 15분을 지나면 옛날 청량산 북쪽 뒷실마을 주민들이 청량사 불공을 위해 넘나들었다는 뒷실고개다. 그곳에서 하늘다리로 가려면 0.5㎞이고 청량사로 내려가려면 0.8㎞다. 뒷실고개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면 795m봉 꼭대기다. 봉을 넘으면 깊은 안부가 나타나고 그 뒤에 높은 절벽의 자란봉이 서 있다. 이후 급경사 계단을 포함해 10분 정도 오르고 내리니 자란봉(796m)과 선학봉(806m) 사이 계곡을 가로지르는 청량산의 명물 하늘다리가 나타난다.

하늘다리는 길이 90m, 지상높이 70m, 폭 1.2m의 현수교로 해발고도는 800m다. 다리 흔들림이 거의 없어 불안하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다리 아래 계곡이 워낙에 깊고 약간 흔들리기도 해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다가 스마트폰이 떨어질까봐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다리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멀리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지류와 계곡 건너편 축융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늘다리

 

2008년 5월 개통될 당시만 해도 청량산의 하늘다리가 산에 설치된 출렁다리 중 최장이었다. 하지만 2016년 경기도 파주시의 감악산 출렁다리(150m)에 최장 자리를 내주고 2018년에는 원주 간현유원지의 소금산 출렁다리(200m)가 국내 최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3위 자리로 내려 앉았다. 그러나 산에 설치된 현수교량으로는 가장 길고 높은 곳에 있어 소금산과 감악산 출렁다리보다는 높이감이 더 뛰어나다. 전국에서 이에 비할 정도의 구름다리는 전남 영암의 월출산 구름다리 정도다. 하늘다리에서 장인봉까지는 0.8㎞이지만 중간에 거의 수직에 가까운 철제 계단을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므로 한번 더 용을 써야 한다.

 

장인봉과 만리산 관창마을

장인봉(870m)은 청량산의 최고봉이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놓은 ‘丈人峯(장인봉)’ 한자 글씨는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뒷면에는 ‘등청량정(登淸凉頂)’ 즉 ‘정상에 올라’라는 제목의 주세붕의 시가 음각되어 있다. 장인봉 정상은 사방이 나무에 가려 조망은 없다. 대신 2~3분 정도 전진하면 멋진 전망대가 나온다. 절벽 위에 있어 아찔하지만 청량산의 핵심 조망터 중 한 곳이다.

장인봉 정상석의 앞면과 뒷면

 

전망대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축융봉이 마주 보이고, 가운데로는 안동호로 흘러가는 낙동강 지류가 크게 휘돌아 흐른다. 낙동강 바로 옆으로는 35번 국도가 산과 강 사이를 곡선으로 헤쳐나간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낙동강 건너편 만리산 자락에 집을 짓고 길을 내고 밭을 일군 관창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인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지류

 

그 관창마을에 청량산의 전경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펜션 겸 카페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가 있다. 카페 앞마당에서 고랭지 사과밭 너머 걸개그림처럼 매달린 청량산과 마주할 수 있어 한국관광공사에서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로 지정했다. 관창마을은 승용차로 오를 수 있다. 청량산에서 봉화 방향으로 가다 오마교에서 좌회전해 들어간다. 산자락 8부 능선쯤의 사과밭 갈림길에서 우회전해 펜션 이정표를 따라 가거나, 직진한 뒤 송신탑까지 곧장 간다.

우리는 장인봉 전망대 부근에 자리를 깔고 뱀꼬리처럼 늘어서 있는 낙동강을 감상하며 점심을 해결했다. 장인봉에서는 급경사 길을 따라 청량산 초입의 탐방안내소로 바로 내려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청량사를 들러야 해서 장인봉에서 뒤로 돌아 하늘다리~뒷실고개~청량사를 거쳐 입석으로 내려갔다. 장인봉에서 뒷실고개까지는 30~40분 정도 걸린다. 뒷실고개에서 청량사까지는 0.8㎞ 거리의 급경사 데크길이다.

만리산 관창마을

 

■ 청량사에 반하다

 

조경의 천재 장인이 설계한 듯 모든 게 완벽

30분 정도 내려가다가 청량사를 만나는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깎아지른 절벽을 배경으로 급박한 비탈에 축대를 쌓아 공간을 만들고, 당우를 들어앉히고 마당을 조성한 게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노거수 소나무와 그 앞에서 축융봉을 바라보고 있는 5층석탑이다.

청량사 노송과 5층석탑. 마주보이는 곳이 축융봉이다.

 

조경의 천재 장인이 설계한 듯 모든 게 완벽했다. 알고보니 주지 스님과 신도들이 험한 산비탈에 옹색하게 들어앉은 청량사를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가꿔 놓은 것이란다. 시멘트 대신 침목이 깔려있는 길, 정갈한 장독대, 기왓장으로 만든 수로, 아담한 찻집 등이 정겨웠다. 급하게 경사진 곳인데도 조경과 설계를 잘하면 얼마든지 멋질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 어수선하기만 한 대형 사찰에 익숙해있다가 짜임새있고 정갈한 모습의 청량사를 보는 것은 행운이었다. 오른쪽에서는 산행 내내 따라다니는 연화봉이 청량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풍수 문외한의 눈에도 절 자리와 가람배치가 절묘했다. 그동안 가보았던 사찰 중 최고였다. 청량산의 모든 길이 청량사로 통하므로 청량사 없는 청량사는 차마 생각할 수 없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617∼686)가 창건하고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고봉선사(1351~1426)가 중창한 것으로 알려진 천년 고찰이다. 한때는 크고 작은 27개소의 암자가 있어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기도 했으나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피폐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 남아있다.

법당인 유리보전(琉璃寶殿)은 오래되고 짜임새가 있어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유리보전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불은 독특하게도 종이를 녹여 만든 지불(紙佛)이다. 유리보전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진다. 홍건적이 고려를 두 번째로 침략했던 1361년(공민왕 10) 공민왕이 왕비인 노국공주와 함께 청량산으로 피신했을 때 썼다고 한다. 청량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지장삼존불상’도 모시고 있다. 부근 청량정사는 퇴계의 청량산 유산을 기념하기 위해 사림들이 세운 건물이다. 입석을 향해 산길을 걷는데 석양 햇살을 받고 있는 노랗고 빨간 단풍들이 은은하다. 입석에 도착하니 오후 5시다. 4시간 30분이 걸렸다.

청량사 전경과 유리보전(왼쪽)

 

장인봉~탐방안내소 하산길

청량산을 다녀와서도 장인봉~탐방안내소 하산길이 궁금했다. 해서 1년이 지난 2021년 10월 22일 다시 청량산을 찾았을 때는 장인봉에서 바로 하산했다. 안내소까지 거리는 2.5㎞이고 중간의 전망쉼터까지는 0.6㎞다. 시작부터 줄곧 철계단 급경사다. 아래에서 올라오려면 땀 좀 흘렸을 것이다. 25분을 내려가니 데크로 넓게 만든 전망쉼터다. 그곳에 서니 뒤로는 장인봉의 뼈대를 이루는 거대 암벽이 우뚝하다. 장인봉 오른쪽에서는 선학봉과 자란봉이 상체를 보여주고 연화봉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다. 급경사는 도무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장인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전망쉼터(왼쪽)와 급경사 하산길

 

장인봉에서 1.5㎞를 1시간 정도 내려간 곳에 할매할배송 이름의 두 그루 소나무가 금강대 절벽 위에 아슬아슬 서 있다. 이후 수 분 간격으로 여여송(如如松)과 삼부자송(三父子松)이 절벽 위에서 독야청청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소나무마다 옆에 그럴듯한 설명이 있으나 어떻게든 스토리를 입히려는 청량산도립공원 직원들의 의욕이 가상할 뿐이다. 삼부자송만 그럴 듯 할 뿐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멋진 자태의 소나무와도 다소 거리가 있다. 금강대 절벽 중간에 놓인 길 옆에는 안전 쇠말뚝을 설치해 위험하거나 무섭지는 않다. 절벽 아래로는 낙동강 지류가 역 S자로 유유히 흐르고 그 위에 놓인 청량교가 선명하다.

전망쉼터에서 올려다본 장인봉 거대 암벽

 

여여송에서 5분 정도 지난 곳에 금강굴이 있다. 퇴계의 제자 금난수가 한 달간 독서와 수양을 하고, 정안이라는 승려가 수도했다는 굴이다. 금강암이라는 조그만 암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믿거나말거나 설명이 아니라 실제로 근거가 있다. 1579년 청량산을 유랑했던 김득연의 글에 “험로를 거듭 지나 마침내 금강굴에 도착하니, 조그만 암자가 있고 암자 밑은 절벽이다. 시렁처럼 얹힌 바위가 곧 기와지붕을 대신한다”고 쓰여 있다. 탐방안내소로 내려오니 장인봉에서 1시간 30분이 걸렸다. 반대로 올라갔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호흡이 가빴을 것이다.

금강대 절벽 중간에 놓인 길(왼쪽)과 삼부자송

 

먹거리

경북 봉화의 대표 먹거리는 송이버섯이다. 따라서 송이전문식당이 많다. 하지만 늘 가을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이럴 때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 봉화의 대표적 먹거리인 숯불 돼지고기다. 봉성면 소재지에는 돼지숯불구이촌이 형성되어 있다. 그중 ‘봉성숯불식육식당’이 가장 유명하지만 다른 집이라고해서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청량산 입구 집단시설지구에도 봉성식 숯불돼지고기집이 있다. 많이 알려진 곳이 ‘오시오숯불식육식당’이다.

“주문을 하기 전 잘 익혀달라”고 말하라고 내가 묶었던 숙소 주인이 넌지시 알려준다. 해서 그렇게 주문했는데 고기가 두껍다. 나중에 숙소 주인한테 얘기하니 얇게 썰어달라고 말해야 했는데 깜박했단다. 결국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고기를 주문하기 전 “얇게 썰고 충분히 익혀달라”고 해야 숯불돼지고기를 만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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