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과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

↑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 모습

 

일본의 1960년대 역시 학생운동의 시대

유럽이나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1960년대 역시 학생운동의 시대였다. 그 때는 일본이 전후의 빈곤에서 벗어나 고도경제성장기로 넘어가던 과도기였다.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의 개막을 알린 것은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이 전력을 투구한 1960년의 ‘미·일 신안보조약 반대투쟁’이었다. 전학련이 출범하기 전까지 전후의 학생운동은 주로 일본 공산당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나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의 반소 봉기를 계기로 당의 혁명노선에 반대하다 제명당한 활동가들이 1958년 12월 ‘공산동(공산주의자 동맹)’을 결성해 공산당으로부터 떨어져나가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공산당의 영향력이 현격히 약화되었다. 전학련은 1950년대 말 ‘공산동’의 산하단체로 결성되었다.

‘신안보조약 투쟁’에는 전학련을 비롯 각종 학생동맹들이 대거 참여해 학생운동이 일시적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신안보조약 투쟁’에서 패배한 후 학생운동 당파들 간에 노선 싸움이 벌어지고 무력 투쟁이 끊이지 않으면서 일반 학생들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공산동 역시 내부 분란으로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일부 학생운동가들이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했으나 이 조직도 1963년 ‘중핵파’와 ‘혁명 마르크스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학생운동은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분열된 조직들은 ‘섹트’로 불리며 더욱 과격한 행동을 취했다. 이들은 ‘당파투쟁도 운동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인식을 가졌으나 그럴수록 일반 학생들로부터는 외면을 당했다.

학생운동이 다시 일반 학생들의 호응을 끌어낸 것은 1965년 이후 시작된 등록금 인상과 교원 임용 등 학내문제 투쟁이었다. 당파를 초월한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는 이 투쟁의 구심점이었다. 1968년 한 해 동안 전공투를 중심으로 전국 116개 대학에서 교내 분쟁이 일어나 이 가운데 15개 대학의 일부 건물이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투쟁이 1968년 촉발된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이다.

 

바리케이드 안은 국가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

1968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공투가 주도한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은 일본 학생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68년 1월 의학부 학생들이 수련의 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이 와중에 학교측 간부가 연금된 것이 발단이었다. 대학 측이 17명의 학생을 제명하고 사건 현장에 없던 학생들까지 제명하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의학부 학생들은 제명 철회를 요구하며 3월 12일 의학부 총합중앙관을 점거했다. 3월 27일엔 도쿄대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을 점거해 다음날 예정된 졸업식을 중단시켰다.

6월 15일 의학부 학생이 또다시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다가 대학총장의 요청으로 동원된 경찰의 물리력에 밀려 강당에서 쫓겨났다. 7월 2일에는 일반 학생들까지 가세한 도쿄대 전공투가 야스다 강당 등 주요 건물을 재검거하고 바리케이드로 출입구를 봉쇄하면서 이른바 ‘야스다 강당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바리케이드 안은 국가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가 되었다. 학생들이 ‘자기 부정’과 ‘도쿄제국대 해체’ 등의 슬로건을 강당 밖에 내걸고 장기전에 돌입한 가운데 1969년 1월 18일 오전7시, 경찰기동대 8000여명이 의학부 총합중앙관과 의학부 도서관부터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기 시작하면서 공방전이 본격화되었다.

경찰은 전공투가 봉쇄하고 있는 의학부, 공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등 각 학부 건물들을 먼저 해제시킨 뒤 오후 1시부터 헬리콥터를 동원해 최루탄을 쏘고 물을 뿌려대며 야스다 강당의 탈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학생들을 제어하지 못해 탈환 작전은 다음날로 연기되었다. 야스다 강당이 불에 타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도쿄대생들의 극렬 저항에 냉소와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야스다 강당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는 동안 도쿄 중심가에서는 학생 3000여명이 바리케이드로 일대를 봉쇄하고 해방구를 만들어 경찰과 대치했다.

 

급기야 무장투쟁노선 추구하는 ‘적군파’ 등장

야스다 강당의 본격적인 진압작전은 1월 19일 오전7시 시작되었다, 돌과 화염병,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오후 3시50분, 기동대원이 3층 강당을 제압하고 오후 5시46분, 옥상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90여명을 검거함으로써 1년여를 끌어온 ‘도쿄대 분쟁’도 종지부를 찍었다. 631명이 검거된 도쿄대 분쟁으로 도쿄대는 1969년도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했다. 야스다 강당 공방전 이후 학생운동은 더욱 소수화·과격화되었고 급기야 1969년 4월 무장투쟁노선을 추구하는 ‘적군파’를 낳았다.

적군파는 1970년 3월 도쿄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여객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자신들의 존재를 세계에 과시했다. 일본 내 적군파의 활동은 1972년 2월 일어난 ‘아사마 산장사건’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경찰에 쫓겨 산악지대를 떠돌던 적군파 일부가 산장에 난입해 인질을 잡고 무려 열흘간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여 대치하다 검거된 이 사건은 전국에 생중계되어 최고 89.7%의 시청율을 기록했다. 경찰조사 결과 주동자들이 사소한 트집을 잡아 29명의 조직원 중 15명을 살해한 사실까지 드러나 일본 열도를 들끓게 했다. 일부 살아남은 적군파는 19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 총기 난사 사건 등을 일으키며 국제테러세력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결국 내분과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멸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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