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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⑬] 피렌체(3) : 피렌체 두오모,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도나텔로, 산 마르코 미술관, 프라 안젤리코

↑  피렌체 두오모의 옆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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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피렌체 두오모와 세례당,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로렌초 기베르티

 

피렌체의 두오모(대성당)는 피렌체 시내 어디서도 아치형 돔의 일부가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하다.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이다. 두오모는 크게는 대성당, 세례당, 종루로 나뉜다. 대성당은 흰색, 녹색, 분홍색 대리석이 적절히 조화되어 화려하면서도 특이한 색깔을 드러내는 성당 외벽과, 아름답고 거대한 붉은 돔이 인상적이다.

피렌체 정부가 두오모 건립을 추진한 것은 13세기 말이었다. 당시 인근의 경쟁 도시인 피사와 시에나가 화려한 두오모를 이미 완성했거나 건립 중이었는데 피렌체가 대성당으로 사용하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규모에서 이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렌체 정부는 900년 정도나 되어 허물어져가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을 헐어내고 그곳에 기독교 사상 가장 큰 ‘신의 집’을 짓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두오모를 짓기로 했다. 두오모는 1296년 9월 8일 착공했다. 설계와 공사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가 맡았다. 이후 화가이자 건축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인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를 거쳐 안드레아 피사노, 프란체스코 탈렌티, 조반니 디 라포 기니 등 초기 르네상스 건축 명장들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14세기 말 건물 공사를 얼추 마무리했다.

문제는 성당 꼭데기에 설치할 쿠폴라(돔)였다. 84m 높이의 건물 위에 직경 43m의 거대한 쿠폴라(반구형으로 된 지붕이나 천장)를 올리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 난공사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으나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1418년 공모전을 열었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와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가 경합을 벌였다.

 

피렌체 두오모는 성당 외벽과 거대한 붉은 돔이 인상적

두 사람은 이미 한 차례 공모전에서 경합을 벌인 적 있었다. 1401년 모직물 가공업조합이 후원한 공모전이었는데 두오모 바로 앞에 있는,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산 조반니를 위한 팔각형 모양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공모였다. 이 세례당은 4세기 무렵 건조되었다가 1059년 재건을 시작해 1128년에 완공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세례당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벽의 상단과 천장에 최후의 심판과 창세기를 소재로 한 비잔틴 스타일의 금빛 모자이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현존하는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자이크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청동문 제작을 공모할 당시 세례당에는 동남북 방향의 3개의 청동문 중 1개(남문) 밖에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남문은 안드레아 파사노가 1329~1336년 고딕풍으로 완성했다. 따라서 1401년의 공모전은 나머지 북문과 동문을 완성할 작가를 선정하기 위한 공개 경쟁이었다. 공모전에는 7명이 응모했다. 그중 25살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24살의 로렌초 기베르티가 최종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 심사위원단은 어느 한 사람을 선정하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문을 하나씩 맡아 작업하도록 했다. 그러자 공동 1등이라는 데 자존심이 상한 브루넬레스키는 청동문 제작을 포기하고 로마로 떠났다. 경쟁자인 기베르티 밑에서 조수를 하던 도나텔로도 브루넬레스키를 따라 로마로 갔다. 1401년 공모전에 출품한 두 사람의 모형 작품이 현재까지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미술관에 진열되어 있어 특성을 비교할 수 있다.

 

기베르티,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에 50년 쏟아부어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고대 건축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을 때 기베르티는 1403년 홀로 북문 제작에 착수했다. 이후 1425년까지 2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아름다운 황금빛 문을 완성했다. 기베르티는 두 짝의 북문에 28장면으로 된 ‘그리스도의 생애’를 부조로 제작했다. 미켈란젤로가 훗날 이 걸작품을 보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감격해했다고 해서 그 뒤부터 ‘천국의 문’으로 불린다.

‘천국의 문’은 기베르티가 새로운 원근법 이론을 적용해 부조의 바닥면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배경처럼 깊이와 공간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기베르티는 이후 동문까지 맡아 1425년 착수하고 27년 만인 1452년 완성했는데 그동안 두 문을 제작하는데 걸린 시간이 50년이나 되었다. 사실상 한평생을 다 보낸 것이다. 이 때문에 기베르티는 몇몇 조각품을 빼고는 이렇다 할 예술적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현재 세례당에 달려 있는 문은 정교한 모조품이고 진품은 두오모의 부속건물인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브루넬레스키, 돔 설치 후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로 불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 간의 2차 경쟁은 성당 건물을 거의 완공한 상태에서 성당 천장에 쿠폴라를 설치하기 위한 1418년의 공모전이었다. 당시 피렌체 정부는 로마의 판테온보다 더 크고 넓은 돔을 건설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돔 건축 공법이 중세를 거치며 사장된 데다 지지대 없이 뚜껑을 얹어야 한다는 점에서 당시 기술로는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난공사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판테온을 비롯해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과 유적들, 비잔틴과 고딕 양식의 건축들을 낱낱이 분석해 그것들의 구조와 공간적 특징들을 파악한 경험을 살려 독창적인 기법을 제안했다. 그것은 쿠폴라의 얼개틀(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설치한 임시 가설물) 없이 쿠폴라를 세우겠다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그는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돔 속에 일정한 공간을 두고 또 다른 내부 돔을 지어 서로 지지하면서 하중을 나누도록 하는 ‘이중 쉘’ 공법을 사용했다. 즉 무거운 안쪽 돔 지붕과 가벼운 바깥쪽 돔 지붕이 서로를 받치도록 함으로써 하중을 분산시켜 거대한 쿠폴라가 가능토록 한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처음에는 잘 믿지 않았지만 모형을 보고 브루넬레스키를 책임자로 선정했다.

브루넬레스키는 1420년 자신의 방식대로 쿠폴라를 올리기 시작했다. 돔 제작에 필요한 건설기계도 스스로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고 거대한 쿠폴라를 선보인 것은 공사 시작 16년만인 1436년이었다.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아버지’로 불렸다. 현재 두오모 옆 건물에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조각상이 있다. 캄비오는 두오모 건물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고 브루넬레스키는 고개를 들어 쿠폴라를 바라보고 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 두오모 구조는 중세 양식이었으나 공사 기간이 길어 완공될 무렵 돔 부분과 조형 정신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 한 건물 안에 두 시대의 양식이 도입된 아주 독특한 건물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오늘날 피렌체 고딕 양식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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