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무구정광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돼

천년을 버텨온 불국사 석가탑에게 1966년은 수난의 해였다. 도굴범들이 9월 3일과 4일 두 차례나 헤집어 금이 간 데다 탑을 보수하면서 생긴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9월 6일 아침 불국사 뜰을 쓸던 스님이 탑신이 기울어져 있고 탑에 금이 간 사실을 발견했으나 시찰 측은 그것이 도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막연히 풍화작용에 의한 자연 마멸이나 지진에 의한 충격 정도로만 생각했다.

며칠 후 도굴 사실이 밝혀져 문화재 당국이 석가탑 해체보수공사를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수’가 아니라 ‘파괴’가 되고 말았다. 10월 13일, 해체공사를 한다며 2층 탑신의 덮개인 옥개석을 들어내다가 떨어뜨려 한 귀퉁이를 깨뜨리더니 한 승려가 석가탑 내부의 사리함 안에 있던 유리 사리병을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산산조각낸 것이다.

그런데 10월 14일, 갑자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유물이 발견되어 관련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이 2층 탑신 중심부에 있는 사리함 속에서 1200여 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발견된 것이다. 그 동안 석가탑의 건립연대를 751년으로 알고 있었는데 당나라 측천무후(690년∼705년) 때 일시적으로 쓰였던 한자인 ‘무주제자(武周制字)’ 중 일부가 무구정광다라니경에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됨으로써 무구정경의 제작연도가 751년 이전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 최고(最古) 목판 인쇄물이라는 의미였다.

그 동안 세계 최고로 인정받아온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가 770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학계는 그 충격적인 발견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일본과 중국이 이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리 없어 한·중·일 간의 최고(最古)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 학자들은 “제작 추정시기를 석가탑이 완공된 8세기 후반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 학자들은 “무구정경의 글자 중 8자가 무주제자이고 중국산 닥종이로 만들어졌다”며 “무구정경은 702년 중국 낙양에서 제작된 뒤 신라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후에도 한·중·일 3국이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40년이 흘렀다.

 

새로 판독된 ‘묵서지편’, 학계 또 다시 흥분시켜

그러다가 2005년 석가탑에서 나온 유물 중 무구정경의 제작연대를 뒷받침할 만한 새로운 문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련 학계를 또 다시 흥분시켰다. 무구정경을 사리함 중심부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조각조각 뒤엉켜 붙은 종이뭉치가 비단에 싸여 사리함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기술로는 그 뭉치를 낱장으로 떼어낼 수 없어 그저 ‘묵서지편’(먹으로 쓴 종이뭉치)이라고 이름을 붙여 다른 유물과 함께 국보 제126호로 일괄 지정하고 보관해왔던 것이다.

포장조차 열어보지 않아 그 속에 무슨 내용이 씌어 있는지조차 모른 채 40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박물관 측은 언론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섣불리 조사한다고 달려들었다가 제대로 판독도 못하고 망가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2005년 9월 묵서지편에서 ‘중수기(重修記․고쳐 세움)’라는 글자가 판독되자 그 묵서지편을 제대로만 해독하면 논란이 분분한 무구정경의 제작연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묵서지편은 거의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였다. “석가탑은 창건 이래 한 번도 수리되지 않았다”라는 통설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유물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전문가들이 묵서지편을 판독한 결과는 2007년 10월에 발표되었다.

 

‘신라 때 제조’ 단정할 수 없어 아쉬워

판독에 따르면 무구정경에 관한 기록은 1024년과 1038년의 중수 기록 모두에 나온다. 석가탑을 처음 해체․보수한 1024년 기록에는 “신라 때 안치한 무구정경을 꺼냈다가 석탑을 다시 세울 때 안치했으며 고려 때 유행한 보협인다라니경을 새로 추가해서 넣었다”고 되어 있어 당시 납탑된 것이 신라 때 제작된 최고본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잇단 지진으로 14년 만에 다시 석가탑을 중수한 1038년의 기록에는 “무구정경과 보협인다라니경을 다시 넣었다”고만 적혀 있어, 신라 때의 최고본 무구정경을 꺼냈다가 다시 안치한 것인지 새로 제작한 무구정경을 따로 넣은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결국 묵서지편 기록만으로는 무구정경이 언제 제작된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만 2차 중수기에 “사리를 수습하되 전물부동(前物不動)하게 안장하였다”(무구정경이 들어 있던 사리함 내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무구정경이 1차 수리 시 납입된 신라 때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보협인다라니경 등 고려 때 추가 납입한 문서들은 주로 사리함 외부에서 발견된 반면 유독 무구정경만 사리함 안에서 발견된 것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 그렇더라도 신라 때 제조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묵서지편을 통해 석가탑의 완성 시기가 새로 밝혀진 것도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1038년 중수기에 “석가탑은 통일신라 혜공왕(재위 765~780)의 태자 시절에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혜공왕이 왕으로 즉위한 765년 이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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