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메이플라워號 미국 땅 상륙 400주년]에 맞춰 조명해본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③ : 1630년 매사추세츠 식민지 건설

 보스턴항에 도착한 윈스럽의 배 그림 (1914년, William F. Halsall 作)

 

☞ 클릭!!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① 메이플라워號 미국 땅 상륙… 플리머스 식민지

☞ 클릭!!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② 버지니아 식민지… 월터 롤리와 제임스 타운

 

by 김지지

 

찰스 1세의 즉위 후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갈등 더욱 증폭돼

1625년 3월 찰스 1세가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갈등이 더욱 증폭되었다. 그는 1629년 청교도가 기반을 두고 있는 의회를 해산, 청교도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으로 대외무역이 위축된 것도 이 분야에서 활동하던 청교도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크게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청교도를 위해 앞장선 이가 있었으니 존 윈스럽(1588~1649)이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학을 나오고 공직에서 활약했던 엘리트였다. 무엇보다 독실한 청교도 신자였다. 그는 청교도에 대한 국교회의 탄압이 가중되자 피난처를 마련해 달라고 기도했다. 당시 청교도들이 염두에 둔 곳은 신대륙 아메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매사추세츠만 지역이었다. 윈스럽은 청교도 신자들에게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영국을 떠나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퓨리턴 국가, 퓨리턴 교회의 설립을 위해 신대륙으로 떠나자고 설득했다.

그들이 매사추세츠만에 정착하려면 찰스1세 국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를 설립해야 했는데 다행히 국왕이 특허장을 내주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는 식민지 토지에 대한 권리는 물론 그 영토를 통치할 정치적 권리까지 받은 것은 엄청난 특혜였다. 그런데도 찰스1세가 청교도에게 이런 특혜를 준 데에는 저항적인 청교도들을 빨리 신대륙으로 보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되자 윈스럽은 그곳에 신앙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로 하고 1629년 8월 청교도 지도자들과 함께 뉴잉글랜드 이주에 관한 ‘케임브리지 협정서’를 작성했다. 협정에 따라 매사추세츠로 떠날 주주들과 영국에 남아 있을 주주들 간에 매사추세츠 식민회사의 지분이 매듭지어졌다. 식민지로 떠나는 자들의 대표였던 윈스럽은 1629년 10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초대 지사로 선출되었다.

존 윈스럽 그림

 

당초 계획과 달리 7개 정착촌으로 분산 거주해

윈스럽을 비롯 청교도들을 태운 4척의 배가 영국 사우샘프턴항을 출항한 것은 1630년 4월 8일이었다. 한 달 후 7척의 배가 또다시 출항함으로써 매사추세츠 퓨리턴 식민지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이렇게 1630년 한 해 동안 매사추세츠로 떠난 사람은 약 2,000명이나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계속 이민이 몰려들어 10년 후 매사추세츠 인구는 약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영국을 떠난 배들이 1630년 6월 처음 도착한 신대륙은 세일럼 근처였다. 그러나 이곳은 이들의 꿈을 펼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답사팀이 매사추세츠만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지리를 익혔지만 적당한 정착지를 합의하지 못하고 논쟁만 계속되었다. 그 사이 극도의 피로와 열악한 거주환경으로 이주자들이 질병에 걸리고 쓰러졌다. 설상가상 북쪽 해안지대에 프랑스인들의 습격 소문까지 돌자 지도자들은 한 곳에 정착하려던 당초의 방침을 바꾸어 분산 거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각각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워터타운, 록스베리, 도체스터, 메드포드, 사우거스, 샤우무트, 찰스타운 등 7개의 정착촌이 생겨났다.

살렘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윈스럽을 묘사한 판화

 

이 가운데 샤우무트는 나중에 영국의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으로 이름을 바꾸고 매사추세츠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실 보스턴도 지형이 협소해 대규모 정착지로는 부적합하고, 바다 쪽으로 너무 돌출해 있어서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여러 정착촌들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미스틱강과 찰스강이 함께 매사추세츠만으로 유입되는 지형적 여건 덕분에 해안지방과 내륙지방 사이의 교역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마실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했다.

다만 한 번 분산된 정착촌이 다시 한 곳에 모여 견고한 성곽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착지를 계속 분산하는 것은 퓨리턴 지도자들의 당초 이상과 어긋났다. 식민지의 사회질서 유지에도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반영해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는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법률과 규정을 제정하고 여러 제도와 기구를 도입해 각 공동체에 적용했다.

 

이상적 신앙 공동체 지향하면서 식민지 정부와 교회 사이에 일체감 형성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꿈꿔온 이주민들에게 교회 체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영국에서처럼 주교가 개별 교회를 관장·지휘하거나 특정 계급이 성직 임명권을 하향식으로 행사하는 중앙집중식 질서는 청교도들이 원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교회 체제, 신앙 생활 규범, 일상생활 규칙을 신자들 상호 간의 계약으로 규정한 회중교회 제도가 식민지 생활에서 혼란을 줄이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첫 케이스로 찰스타운과 워터타운에 회중교회가 설립되었다. 찰스타운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턴으로 옮겨져 보스턴제일교회가 된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와 플리머스 식민지 지도

 

윈스럽 지사가 이끄는 식민지 정부가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식민지 정부와 교회 사이에는 일체감이 형성되어 상호 협조 속에 행정체제가 자리잡았다. 식민지 정부는 자유인 신분자들에게만 재산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또 재산소유권자만 행정에 참여하고 정식 교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교회 정회원에게만 토지가 분양됨으로써 교회는 신앙 공동체 뿐만 아니라 세속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참정권도 청교도 교인들에게만 주어졌다.

초대 지사 존 윈스럽의 신앙심은 고집스러웠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으로 통하는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라는 말을 일상화시켜 율법 사회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것은 자칫 종교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그런 경향을 보였다.

그런 시기에 청교도 목사의 딸로 태어난 앤 허친슨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는 “목사와 교회는 중요하지 않다”며 율법 준수만을 강조하는 교회에 비판을 퍼부었다. 그의 가정예배에는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윈스럽 지사가 “왜 분열을 조장하는 모임을 갖느냐”며 그를 법정에 세웠다. 교회재판은 17개월을 끌면서도 결론을 못 냈으나 종국에는 윈스럽이 ‘성경에서 제시한 여성의 본분에 대한 이탈’이라는 죄목을 꺼내면서 허친슨은 1638년 3월 22일 파문과 추방 판결을 받았다. 쫓겨난 허친슨 부부는 로드아일랜드로 이주해 새로운 마을을 세웠다. 포츠머스시가 이렇게 생겼다. 허친슨은 금슬 좋던 남편과 사별한 지 1년 만인 1643년 원주민들의 습격으로 죽었다.

앤 허친슨 재판 그림

 

윈스럽은 또한 영국 국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아 신대륙으로 건너오고도 신대륙에 자리를 잡은 뒤에는 그 역시 다른 종파를 허락지 않으려 했다. 가톨릭 신자나 퀘이커 교도, 위그노 등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매사추세츠가 아닌 타 지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공동체가 점차 자리가 잡혀나가자 1636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정부가 뉴타운(지금의 보스턴 케임브리지)에 대학을 세우기로 하고 기금을 조성했다. 이후 1636년은 하버드대의 공식 창설 연도가 되었다. 1638년 존 하버드 목사가 죽으면서 이 대학에 수백권의 책과 재산의 일부를 기증한 것을 기념해 1639년 3월 학교명을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로 바꾸었다.

초기 하버드대 그림

 

인구와 새로운 정착촌 증가로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려는 초기의 꿈 희석돼

윈스럽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경건한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신분에 따른 빈부 격차는 당연한 것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통념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신분과 재산권 제도는 하나님이 정해 준 질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공동체에서 상류계층은 영국에 있을 때부터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더니 뉴잉글랜드에 와서도 여전히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이 상류계층은 영국에서 익숙하게 경험해 온 존경과 복종에 기초를 둔 이른바 서열 사회를 그대로 뉴잉글랜드에 이식하려 했고, 일반주민들도 영국에 있을 때부터 이런 사회질서에 익숙해져 있었다. 덕분에 윈스럽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은 일반 주민들의 큰 저항 없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토지 분배에는 시각차가 컸다. 일반 주민들은 모든 토지가 평등하게 고루 분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상류층은 식민지의 발전을 위해서 토지 사용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므로 투자 능력에 따라서 토지를 차등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힘이 약한 서민들의 일방적 패배로 끝이 났다.

이후 계속적인 이민자들의 증가로 1640년 보스턴의 인구는 약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새로운 토지가 활발히 조성되고 새로운 정착촌이 계속 증가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보스턴의 사정이 점점 지도자들의 꿈을 외면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인구 증가로 사회적 동질성이 점차 약화되고 직업과 종교관 등의 다양성이 증대되었으며 경제적 이익추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보스턴은 계속 밀려드는 이주민들이 뉴잉글랜드에 첫발을 딛는 곳이다보니 상업과 무역의 번영을 누렸다. 이주자들의 체류비 수입 뿐만 아니라 모피, 목재, 농어축산물의 교역 중심지로 발전하고 식민지 정부의 행정, 사법, 입법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매사추세츠 퓨리턴 식민지를 기획하고 지도해온 초대 지사 윈스럽은 1649년 사망했다. 결국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려는 꿈이 점차 희석되면서 정치·경제적 번영의 길로 방향을 틀며 달려갔다. 빈부 차이도 점점 커졌다. 신대륙 식민지는 엄연히 대영제국의 일부였다. 부자들은 다시 유럽 귀족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 대도시의 특권 계급층은 자신을 완전히 영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유럽풍의 대저택을 짓고 호화 파티를 열며 노예를 부리고 영국 귀족처럼 행세했다.

 

본국의 간섭과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결국에는 국왕 직속 식민지로 전락

그러는 한편,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본국의 간섭과 지배에서 자유로운 자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퓨리턴 자치 식민지의 기초를 갖춰나갔다. 인근에 위치한 코네티컷, 뉴헤이븐, 플리머스 등 소규모 식민지와 연합하여 ‘뉴잉글랜드 동맹’을 형성하고 맹주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명예혁명 후 영국은 제국정책의 일환으로 버지니아 식민지를 포함해 해외의 모든 식민지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국 정부와 식민지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는데, 그 최초의 사건이 1676년에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베이컨의 반란’이었다. 북부의 뉴잉글랜드 식민지인들도 영국 정부에 불만이었다.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영국 정부의 허가 없이 뉴햄프셔와 메인의 식민지들을 합병하자 영국 정부는 1684년 매사추세츠만 식민회사의 특허장을 취소했다.

그에 따라 1686년에는 새로 파견한 지사를 중심으로 매사추세츠, 메인, 뉴햄프셔,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를 하나의 식민지로 통합했다. 새 지사는 식민지 의회를 해산하고, 부역세 같은 세금을 거두었다. 청교도들의 교회 건물을 성공회에 넘겨주기도 했다. 분개한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지사를 영국으로 추방하자 영국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691년에 매사추세츠를 회사 식민지에서 왕령 식민지로 바꾸는 새 칙허장을 발급했다. 이렇게되자 매사추세츠는 더 이상 퓨리턴 자치 식민지가 아닌 하나의 평범한 국왕 직속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에는 독립전쟁으로 치달아야 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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