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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라워號 미국 땅 상륙 400주년]에 맞춰 조명해본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② : 버지니아 식민지… 1585년 월터 롤리 탐험대 파견, 1607년 제임스타운 건설

↑  제임스타운 상상도.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소속 화가 Sydney King 作

 

☞ 클릭!!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① 메이플라워號 미국 땅 상륙… 플리머스 식민지

☞ 클릭!!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③ 존 윈스럽과 매사추세츠 식민지

 

by 김지지

 

영국의 신대륙 초기 이주사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사는 영국인이 신대륙에 건설한 정착지 세 곳에 대한 기술로 시작한다. 1607년 버지니아에 건설한 제임스타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주한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 1630년 존 윈스럽을 중심으로 청교도들이 개척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앞서 신대륙에서 식민의 꿈을 펼쳐보려는 영국인들의 노력은 많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영국 왕 헨리7세의 후원을 받아 시도된 베니스 출신 존 캐벗의 1497~1498년 북미 해안 탐험이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발을 내디딘 지 불과 5년만의 시도였으나 당시 영국은 국력이 약하고 국민적 관심이 주로 국내에 쏠려있어 캐봇의 탐험은 실질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후 윌리엄 호킨스, 리처드 호어 등 몇몇 모험가들의 산발적인 원정 활동이 있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신대륙에 관심을 보인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년) 즉위 후 정치가 안정되고부터였다.

그 무렵 영국 사회에 신대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1577년에서 1580년까지 3년에 걸친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였다. 드레이크가 귀환한 1580년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이베리아 반도,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지중해, 그리고 신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강력한 군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이런 시기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신대륙으로 영토를 넓히려면 펠리페 2세의 보급기지 구실을 하던 신대륙에서 스페인 세력을 견제해야 했다. 여왕이 스페인 무역선에 대한 노략질을 묵인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드레이크를 비롯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영국 항해가나 식민자가 사실상 해적이었는데도 영국 왕실이 이들에게 작위를 주어가며 격려·고무한 데는 이런 정치적·종교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

영국의 국내 사정 또한 신대륙 진출의 필요성을 야기했다. 절대 인구가 급증하는데다 시골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소작농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런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거리에는 거지와 부랑자들이 득실거렸다. 왕실과 정부는 이들이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상황이 장기화하면 결국 사회적 질서와 기강이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처럼 신대륙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분출하고 있을 때 영국의 식민지 꿈을 구체화한 이가 있었으니 풍운아요 모험가인 월터 롤리(1554~1618)다.

 

식민의 꿈을 구체화한 인물은 월터 롤리

월터 롤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터라 여왕에게 신대륙 식민지 건설 특허권을 달라고 간청했다. 여왕은 1584년 3월, ‘기독교 군주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모든 이교도의 땅을 식민하고 소유할 권리’를 롤리에게 부여했다. 식민지 조건은 세 가지였다.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금광 개척에 적합하며, 스페인 선단을 약탈하는 선단의 출항기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터 롤리

 

롤리는 1584년 4월, 식민지를 물색할 정찰대를 신대륙에 보냈다. 정찰대는 적합한 장소를 찾아 엘리자베스 1세의 별명 ‘버진 퀸(Virgin Queen)’에서 따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찰대는 버지니아에서도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에 속해있는 로어노크섬이 최적지라고 결론을 내린 뒤 1584년 9월, 2명의 인디언 원주민을 데리고 영국으로 귀국했다.

롤리는 정찰대로부터 보고를 받고 정식 원정대 결성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식민 사업에서 남게 될 이익을 분배하는 조건으로 비용을 분담할 투자자를 모집했다. 민간 투자자들이 합자한 일종의 주식회사가 식민지 건설의 주체가 되는 이와 같은 방식은 이후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의 모형이 되었다. 식민자들은 투자 비용을 건지려고 식민 사업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이는 본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형 식민지의 건설이 촉진되는 결과를 낳았다.

롤리가 결성한 1차 원정대는 400명이나 되는 대규모였다. 이 원정대가 영국의 플리머스항을 떠나 역사적인 항해길에 오른 것은 1585년 4월 9일이었다. 원정대의 다수는 용병이어서 실제 신대륙 정착 예정자는 전체의 4분의 1이 약간 넘는 108명이었다. 원정대는 1585년 8월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로어노크섬에 도착했으나 가혹한 환경, 식량 부족, 원주민과의 갈등 탓에 15명의 군인을 로어노크섬에 남겨놓고 10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롤리의 식민 사업은 실패했지만 ‘멋진 신세계’를 건설했던 원동력

롤리의 1차 식민 사업은 이렇게 성과 없이 끝났으나 당시 원정대에 참가했던 과학자 토머스 해리어트는 식민지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신대륙에 관한 답사기를 집필했다. 그것이 신대륙 풍물에 대한 최초의 회화적 묘사라고 할 수 있는 ‘새로 발견된 버지니아에 대한 사실적 보고서(A Brief and True Report ofthe New Found Land of Virginia)’다. 해리어트와 함께 신대륙에 갔던 존 화이트의 수채화가 곁들여진 이 책은 1590년 수채화가 판화로 대체된 후 4개 국어로 번역 출판하면서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토머스 해리어트가 1590년에 쓴 책(A Briefe and True Report of the Newfound Land of Virginia) 속표지

 

롤리는 다시 2차 원정대를 결성했다. 110명이 3척의 배에 나눠탄 원정대는 1587년 5월 8일 플리머스항을 떠나 7월 22일 로어노크섬에 도착했다. 대장은 1차 원정 때 스케치 화가로 참여한 존 화이트가 맡았다. 그러나 두 번째 원정대 역시 인디언과의 충돌과 식량난을 견디지 못해 일부 대원을 현지에 남겨둔 채 영국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사람들 중에는 원정대장의 딸과, 그 딸이 막 순산한 손녀가 포함되어 있어 원정대장은 하루라도 빨리 신대륙으로 떠나야 했으나 당시 영국의 국내 정세가 그들의 신대륙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임박하면서 정부가 해외로 나가는 모든 선박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원정대장 존 화이트 그림, 로어노크에서 춤추는 인디언들 (1585년 수채화)

 

원정대장은 한동안 출항하지 못하다가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해 승리를 거둔 후인 1590년 3월 버지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로어노크섬에 남아있던 원정대는 종적이 묘연하고 정착지는 사라졌다. 전쟁이나 습격의 흔적도 없고 가재도구나 옷가지도 그대로 남긴 채 사람들만 없어졌다. 기둥에 새겨진 수수께끼의 단어(CROATOAN) 하나만 남긴 채 사람이 증발한 이 사건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롤리는 그후에도 사라진 식민자들의 행방을 찾으려고 원정대를 수 차례 로어노크에 보냈으나 그때마다 폭풍이나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상륙도 못하고 돌아왔다. 롤리의 식민 사업은 이렇게 실패했지만 그의 꿈은 후세에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멋진 신세계’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유산의 직접적 상속자인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은 롤리의 비전과 정신을 기려 1792년, 노스캐롤라이나의 중앙 부근에 주(州)의 새로운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롤리’로 명명했다.

 

제임스 타운은 초기 버지니아 정착민 사회의 중심지

월터 롤리의 뒤를 이어 신대륙 진출에 나선 것은 1606년 민간 투자가들이 남부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할 목적으로 설립한 버지니아 식민회사였다. 당시 버지니아는 지금의 버지니아주와 달리 북미 대륙 동남부 평야지대와 해안지역 전부를 의미했다.

정착 목적으로 구성된 첫 이주자는 120명이었다.. 그들은 1606년 12월 3척의 배에 나눠 타고 영국을 떠났다. 항해 도중 16명이 죽어 104명만이 1607년 4월 오늘날의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 근처의 체사피크 만 연안에 도착했다. 이들은 만을 따라 50㎞ 쯤 들어간 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지를 제임스타운이라 명명했다.

제임스타운 위치

 

현재 체서피크만으로 흘러드는 5개의 큰 강줄기 가운데 맨 아래쪽 줄기는 제임스강이다. 그 강어귀에서 내륙 쪽으로 약 60마일을 거슬러 오르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제임스섬이고, 제임스타운은 이 작은 섬의 연안에 세워진 정착지 이름이다. 강과 섬과 정착지에 붙은 제임스 이름은 당시 국왕 제임스1세에서 땄다.

제임스타운은 1698년 주도가 윌리엄스버그로 옮겨갈 때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초기 정착민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들 역시 식량부족과 인근 늪의 극성스러운 모기로 인해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려 첫 겨울을 넘기면서 전체의 반수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버지니아 식민회사는 낯선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7인 평위원회가 식민지 운영을 책임지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했다.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 주역은 존 스미스

7인 중에는 존 스미스(1580∼1631)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정착지 주변 지형을 답사하고 인디언과 협상하고 교역해 식량을 구해오는 임무를 맡았는데 담대한 용기와 능란한 임기응변으로 잘 수행했다. 디즈니의 만화영화로도 유명한 포카혼타스 일화도 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 일어났다. 1607년 12월 스미스는 식량을 구하러 일행들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인디언의 포로가 되었다.

처형되려는 순간 인디언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12세)가 추장에게 스미스를 살려주기를 간청해 스미스는 풀려났다. 이주자들이 그 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스미스가 이처럼 목숨을 걸고 발로 뛰어 구해온 식량 덕분이었다. 이런 공으로 스미스는 1608년 9월, 임기 1년의 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존 스미스(우측)와 포카혼타스 동상.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스미스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주민 모두 밭을 갈고 사냥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면서 방책을 더욱 공고히 쌓고, 우물을 깊이 파 안전한 식수를 확보하고, 옥수수 재배 면적을 대폭 늘려 식량 자립도를 높였다. 버지니아의 강들과 체서피크만을 탐사해 놀랄만큼 정확한 버지니아 지도도 만들었다. 그의 손길은 계속 필요했으나 1609년 9월 화약 폭발로 화상을 입어 귀국해야 했다. 스미스가 떠난 후 이주자들은 버지니아 식민사에 ‘기근의 시기’라고 기록된 최악의 겨울을 보냈다.

스미스가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공식 지도자로 일한 것은 1년이 채 안된다. 그런데도 역사는 그를 식민지 건설의 주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첫째 이유는 그가 식민지 지형과 사정, 인디언 원주민의 생활상, 이주자들과의 관계, 식민의 난관과 그 대안에 관한 길잡이와 조타수 역할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가 버지니아 식민사의 가장 권위 있는 ‘기록자’였다는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간 뒤 스미스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모두 7권의 책을 남겼다. 그중 5권이 버지니아에 관한 것이다.

셋째는 신대륙에 정착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해 1614년 다시 출항해 새로 상륙한 곳에 ‘뉴잉글랜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사추세츠주 남동부에 위치한 코드곶만(Cape Cod Bay)에서부터 메인주 북부의 페놉스콧만(Penobscot Bay)에 이르기까지 해안의 자세한 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존 스미스가 1614년 뉴잉글랜드 해안을 항해한 후 제작한 지도. 이곳의 뉴잉글랜드는 오늘날의 북 버지니아 지역이다. 왼쪽 위 인물은 존 스미스다.

 

버지니아 식민회사는 1608년과 1609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더 많은 개척자들을 보냈으나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삶은 여전히 힘들었고 비참했다. 이런 그들을 구해준 것이 담배였다. 인디언들이 피우던 담배는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후 유럽 귀족들의 필수 기호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제임스타운 근처에 살던 인디언들도 영국 개척자들에게 담배농사를 가르쳐주었다. 개척자들은 담배 농사에 크게 성공했다. 이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꿈에 부푼 유럽인들이 제임스타운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버지니아는 담배 식민지로 자리잡았다.

 

포카혼타스 공주 이야기

포카혼타스 공주는 제임스타운의 이주자들을 자주 찾았고 그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1614년 식민자 중 한 사람인 존 롤프(1685~1622)와 결혼했다. 롤프가 담배 재배에 성공해 제임스타운 식민지가 영속적인 정착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도움 덕분이었다. 롤프는 버지니아 토착 담배에 좀 더 순한 자메이카 종자를 교배시킨 새로운 담배 재배를 성공시켰다. 그것을 영국으로 내다 팔았다.

포카혼타스 초상화 (1616년 그림)

 

런던 사람들은 곧 담배 없이는 못 살 지경이 되었고 제임스타운은 번영했다. 어느덧 버지니아는 담배 농사의 본거지가 되었다. 담배 농사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것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불러들인 계기가 되었다. 1616년 포카혼타스는 두 살 난 아들과 함께 남편의 나라 영국으로 건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국왕 제임스 1세는 물론 자신이 생명을 구해준 스미스도 만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듬해 신대륙으로 돌아오기 직전 병에 걸려 영국에서 21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담배 재배에 성공해 자활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에 자극받아 신대륙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이주자가 날로 증가하던 1620년 11월 21일, 이번에는 35명의 청교도를 포함해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 북쪽 해안가인 코드곶만(Cape Cod Bay)에 닻을 내리고 12월 21일 모두 플리머스에 상륙했다. 플리머스 식민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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