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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라워號 미국 땅 상륙 400주년]에 맞춰 조명해본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① : 1620년 ‘순례자의 시조들(Pilgrim Fathers)’ 신대륙에 상륙

↑ 신대륙 플리머스 앞바다에 정박 중인 메이플라워호 그림 (1882년, William Halsall 作)

 

☞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② 버지니아 식민지… 월터 롤리와 제임스 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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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미국 개척사 3-③ 존 윈스럽과 매사추세츠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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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청교도가 영국 국교회에 반발한 게 이주의 시작

가톨릭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영국 전역에서 높아지고 있던 16세기, 헨리8세(1491~1547년) 국왕까지 나서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교황에 반기를 들었다. 헨리8세가 로마 교황을 대신해 자신이 영국 교회의 최고지도자임을 선포하는 ‘수장령’(1534년)을 발표하는 순간 헨리8세와 로마 교황과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수장령 발표에 따라 영국 왕을 수장으로 한 영국 국교회가 1563년 세워졌다.

헨리 8세

 

이러한 일련의 과정도 종교개혁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지만 헨리8세를 수장으로 한 영국 교회는 로마교황이 임명한 사제들을 몰아내고 국왕이 새로 사제들을 임명했을 뿐 기존 가톨릭의 의식과 교리 대부분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영국의 프로테스탄트(청교도)는 국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청교도에서도 특히 거세게 반발한 것은 급진적 분파인 ‘분리주의자들'(The Separatists)’이었다. 그들은 부패한 국교회를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회 질서를 타파하고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순수함을 추구했다. 그러자 영국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국교회와 정부가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다양한 형태로 박해했다.

급진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고 신앙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에는 견고한 국교회 체제와 정치 체제를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 영국에서 교회개혁을 포기하고 별도의 새 교회와 새 사회를 건설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중심 인물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고 엘리자베스 여왕 밑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던 윌리엄 브루스터(1567~1644)였다.

윌리엄 브루스터 초상화

 

미지의 신대륙에 신앙 공동체 세우기로 해

브루스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하자 급진파 교도들이 그를 따라 1608년 네덜란드 레이던에 정착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다.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감옥에 가지 않고 종교 생활을 누린다는 것에 감사하며 10년간 생활했다. 그러나 자녀들이 모국어를 잊고 그들의 신앙생활도 느슨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대서양 건너 미지의 신대륙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신앙 공동체’를 실현시키자고 뜻을 모았다. 이웃 나라 네덜란드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미지의 땅에 정착하기 위해 문명사회를 떠난다는 것은 실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들은 먼저 1620년 신대륙의 버지니아 개발권을 독점하고 있는 영국의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신대륙에 정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뒤이어 영국으로 돌아가 신대륙으로 떠날 신도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1620년 7월 22일 신도, 용인(傭人), 선원 등 120명이 ‘메이플라워호’와 ‘스피드웰호’를 타고 영국 사우샘프턴 항구를 떠나 신대륙으로 향했다. 그러나 스피드웰호가 잦은 고장과 사고로 회항하면서 출발이 지연되었다. 이때 항해의 불편함과 고통에 기진맥진한 사람 20명이 탈락했다.

그후 1620년 9월 16일(당시 영국이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9월 6일)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Mayflower)가 단독으로 영국 남서 해안 데번주에 있는 항구도시 플리머스항에서 출항했다. 102명 중 청교도는 35명이었고 식민지 회사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 모집한 용인들과 선원 등은 67명이었다. 선원도 25~30명 정도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는 무게 120t에 길이 27.5m의 목제 범선이었다. 이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한 청교도들을 두고 훗날 미국에서는 ‘순례자의 시조들(Pilgrim Fathers)’이라고 불렀다.

미국 플리머스 항에 정박해 있는 메이플라워Ⅱ호. 영국에서 고증을 거쳐 1957년 복원한 뒤 미국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메이플라워Ⅱ라고 명명했다.

 

1620년 11월 21일 신대륙에 닻 내려

그들은 두 달을 항해했으나 육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거센 비바람과 파도는 그들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탈진시켰다. 도대체 신대륙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해안 저멀리 약속의 땅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영국을 떠난지 66일만인 1620년 11월 21일(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11일) 코드곶만(Cape Cod Bay)에 닻을 내렸다.

당초 목적지는 버지니아 식민지에 속해 있는 허드슨강이었으나 풍랑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고 긴 항해에 기진맥진해 더 이상의 항해를 포기하고 코드곶만(Cape Cod Bay)에 닻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목적지였던 버지니아에서 1000㎞나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린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실수다”, “고의다”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플리머스와 코드곶만 위치

 

청교도들은 정착지를 물색한 끝에 한 곳을 찾아냈다. 그들보다 앞서 이곳을 탐험했던 모험가 존 스미스가 ‘플리머스’라고 명명한 곳이다. 영국 플리머스에서 출발했는데 신대륙에서도 공교롭게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당초 목적지보다 북쪽이어서 그때까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탐험하거나 정착을 위해 개발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야말로 미지의 땅이었다.

그들은 배에서 내리기 전, 이 미지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민적 정치공동체를 자체적으로 구성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주민의 평등권과 자치권 보장에 관한 이른바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이다. 서약서에는 배에 탔던 성인 남자 41명이 서명하고 서약에 기초해 존 카버(1576?~1621)가 초대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메이플라워 서약’ 그림 (1899년, Jean Leon Gerome Ferris 作)

 

코드곶만에 닻을 내린 11월 21일 먼저 무장 선발대가 육지에 내려 주변을 정찰하고 약간의 땔나무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 날은 주일이어서 쉬고 11월 23일에는 부녀자들이 밀린 빨래감을 가지고 해안으로 내려가 빨래를 했다. 이후 한 달 동안 낯선 땅을 정찰하고 땔감과 식량을 조금씩 조달하는 과정에서 그곳이 정착지로서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겨울 동안 추위·굶주림·질병으로 거의 절반 죽어

무엇보다 매서운 한파가 닥쳐오고 있어 빨리 거처를 마련해야겠기에 12월 21일(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11일) 모두 해안에 상륙했다. 이때의 상륙을 기념한다며 지금도 플리머스 해안가에 놓여있는 것이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다. 물론 신대륙에 처음 상륙할 때 밟은 바위를 기억하고 보존했을 가능성이 지극히 낮기 때문에 후손들이 만들어낸 작위적인 바위일 가능성이 높다.

플리머스 바위

 

순례자들이 신대륙에서 맞은 첫해 겨울은 혹독했다. 이듬해 봄이 왔을 때 추위·굶주림·질병으로 거의 절반이 죽었다. 운좋게 살아남은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원주민(아메리카 인디언) 왐파노악족이었다. 그중에는 뜻밖에 영어를 할 줄 아는 2명의 인디언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사모세트는 원래 메인주 지역에 살던 원주민인데 과거 이곳을 탐사하던 영국 탐험대를 따라 캐나다의 뉴펀들랜드까지 동행한 적이 있어 영어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인 스콴토는 스페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영국으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한 식민회사의 간부를 따라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온 원주민이다.

곧 이들을 통해 플리머스의 본래 지명은 파우툭세트라는 것, 1617년 전염병이 크게 돌아 이곳에 살던 인디언들이 대부분 죽었다는 것, 이 지역의 여러 인디언 부족 중에서 최강의 부족은 플리머스 서남쪽 약 40마일 지점에 위치한 나라간세트만 일대에 살고 있는 왐파노악족이고 추장은 ‘위대한 추장’이라는 뜻의 마사소이트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착민들은 1621년 3월 그들을 찾아온 왐파노악족 추장과 우호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옥수수 재배법, 물고기 잡는 법, 단풍나무 즙을 채취하는 방법, 노루 등 짐승을 사냥하는 법 등을 전수받았다. 그러던중 초대 총독 카버가 1621년 4월 들판에서 일하다가 쓰러져 죽는 슬픔을 겪었다. 후계자는 카버와 함께 레이던에서 생활했던 윌리엄 브래드퍼드(1590~1657)였다. 그는 이후 세 차례나 총독으로 뽑혀 정착촌의 기반을 마련했다. 회고록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에 대해’를 남겨 ‘미국 역사의 아버지’이자 ‘미국 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윌리엄 브래드퍼드 동상.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있다.

 

플리머스, 식민지로는 번성하지 못하고 1691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합병돼

정착지의 가을은 아름다웠고 옥수수 작황은 대풍이었다. 그들은 10월 어느날을 ‘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정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왐파노악족 추장과 전사들도 초대했다.

감사 축제는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흥겨움 속에 진행되었다. 푸짐한 음식과 과일에 포도주와 칠면조 고기까지 곁들인 흥겨운 잔치에 손님들은 흠뻑 빠졌다. 처음 맛보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에 취한 인디언들은 사흘이 지나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 전통이 계속 이어져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국경일로 선포하고, 1941년 연방의회에서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입법했다.

첫 추수감사축제 그림 (1914년, Jennie Augusta Brownscombe 作)

 

그러던 중 1621년 11월 11일 영국에서 포춘호가 30여명의 성인 남녀들을 태우고 플리머스에 도착함으로써 정착민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들 중에는 정착민들의 가족도 있어서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정착에 자신이 생긴 때문인지 메이플라워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그 배에 탄 정착민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영국에서 건너오는 이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정착지 경제도 서서히 발전과 안정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의 종교적 열정과 개척정신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더러 바다를 건너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주민은 7000여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플리머스는 끝내 식민지로는 번성하지 못하고 1691년 이웃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합병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준 개척정신과 불굴의 의지는 훗날 미국인들에게 신화처럼 살아남았고 오늘날의 강대한 미국을 이룬 정신적 자산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플리머스 식민지와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

 

미국인들, 오랫동안 메이플라워호 타고온 순례자들을 진정한 선조로 여겨

알다시피 이들 순례자들이 영국에서 건너온 최초의 이민자는 아니다. 이들에 앞서 버지니아에 이주한 최초의 이민자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신대륙 경영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미국인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순례자들을 진정한 선조로 여기거나 미국 건국의 주체로 인식했다. 이유는 버지니아 이민자들 대부분이 빈민, 부랑아, 전과자 등 선조로 내세우기는 좀 부끄러운 비천한 계층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온 목적도 오로지 돈벌이였을 뿐, 개척, 자유, 모험 등 오늘날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뿐만 아니고 이들이 훗날 만들어낸 노예제도, 귀족제도, 장원제 등 남부의 생활상도 오늘날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신대륙의 이상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이 비천한 백인 노동자들과 노예들에 의해 시작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미국이 개척정신에 불타고 자유와 평등의 숭고한 이념을 가진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하나의 건국신화에 불과하다. 순례자들이 미국의 건국설화로 만들어진 건 1930년대 뉴딜 대공황기 때이다. 당시 미국의 사회통합을 위해서 상징조작 차원에서 설화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상징조작조차 오늘날에는 이런저런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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