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제주 오름 가봐수까 ①] 제주 윗세오름… 범접할 수 없는 오름의 지존

↑ 윗세오름 선작지왓의 족은오름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록담 분화구. 철쭉으로 알려진 털진달래가 황홀하다

 

☞ 내맘대로 평점(★ 5개 만점). 등산 요소 ★★★ 관광 요소 ★★★★

 

by 김지지

 

윗세오름은 제주도 전체 오름 중 단연 으뜸이다. 제주의 어떤 오름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오름의 지존이다. 윗세오름은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지만 백록담의 거친 화구벽(火口壁)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등산로는 세 곳이다. 영실, 어리목, 돈내코다. 한라산 정상을 기준으로 영실은 남서쪽, 어리목은 북서쪽, 돈내코는 남동쪽에 있다. 이중 일반인들이 즐겨 찾는 곳은 영실이고 부담스러워하는 곳은 돈내코다. 거리가 긴 데다 지루하기 때문이다. 어리목(970m)도 나름 인기가 있지만 영실(1280m) 보다 고도가 높고 목적지인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거리가 1㎞ 길어 등산객이 선호하는 곳은 영실이다.

한라산 백록담 분화구. 사진 아래쪽이 남벽이다. (출처 한라산국립공원)

 

하늘에서 내려다본 영실기암. 왼쪽이 병풍바위, 가운데가 영실기암과 분화구다. 멀리 보이는 것이 백록담 분화벽. 위에서 보면 영실기암이 오름인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출처 한라산국립공원)

 

초급 등산객은 영실로 올라가 윗세오름을 반환점 삼아 다시 영실로 내려오는 코스를 통해 윗세오름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 국가 명승지로 지정된 영실기암과 선작지왓 등의 절경도 영실 쪽에 있다. 중급 등산객은 영실에서 올라가 윗세오름을 지나 어리목으로 내려오거나 반대 코스(어리목→영실)로 진행해 운동 효과도 기대한다. 고급 등산객은 중급 코스에다 남벽 분기점 전망대까지 연장해 다녀온다. 거리를 정리하면 영실 →(3.7㎞)← 윗세오름 대피소 →(2.1㎞)← 남벽분기점 전망대 →(2.1㎞)← 윗세오름 대피소 →(4.7㎞)← 어리목 순이다. 총거리는 12.6㎞이고 등산 시간은 수준에 따라 5~7시간 정도 소요된다.

영실 등산로(위쪽)와 어리목 등산로

 

■초급 코스 : 영실~윗세오름~영실(7.4㎞)

 

영실(靈室)은 한라산 정상의 남서쪽 산허리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이 하늘로 솟아있는 모양새다.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흡사하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 ‘산신령이 사는 골짜기’라는 뜻도 있다. 영실 탐방로 입구에서 윗세오름까지 거리는 3.7㎞다. 오르는데 2시간, 다시 영실로 내려오는데 1시간 30분 정도 잡으면 된다. 윗세오름을 거쳐 어리목으로 내려가려면 1시간을 더 잡아야 한다.

영실 코스는 일부 구간에 가파른 돌계단과 데크계단이 있지만 고원이면서 평원인 선작지왓까지 거리가 500m 정도에 불과하고 등산로 상태도 좋아 그다지 힘들지 않다. 부모 손을 잡고 올라온 초등학생 아이들도 많이 보인다. 영실 코스가 어리목 코스보다 오르막 시간이 덜 걸리는 것은 거리가 짧기도 하지만 영실 출발 지점의 해발고도가 어리목에 비해 300m나 높기 때문이다. 경사가 끝나는 선작지왓 고원의 해발고도가 1600m여서 1시간~1시간 30분 만에 고도를 300m만 높이면 된다. 선작지왓 평원도 사실상 평지를 걷는 것이어서 유유자적하며 걸을 수 있다.

영실 탐방로 초입에서 1㎞ 남짓 거리는 비교적 완만하다. 초입은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뻗어있는 아름드리 적송 군락이다. 2001년 산림청이 주관한 아름다운 숲 공모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 우수상을 수상했다. 적송 지대를 벗어나 잡목이 빼곡한 수림 지대를 지나면 영실계곡이다. 곧이어 침목 계단길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다행히 500m 정도만 가파르다. 고도를 높일수록 서귀포 해안, 산방산, 차귀도 등이 뚜렷해진다.

침목 계단길을 지나 경사진 데크 계단길로 들어서면 저 멀리 높은 곳에 병풍바위가, 계곡 건너편에 영실기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실기암은 움푹 내려앉은 계곡을 에워싸고 하늘을 찌를 듯 뾰족뾰족하고 거대한 수직 암벽 봉우리들의 집합체다. 춘화, 녹음, 단풍, 설경 등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모습과 울창한 수림이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보여준다. 대한민국 명승(제84호)이면서 백록담, 물장오리와 더불어 한라산 3대 명소이기도 하다. 영실기암 중에서도 삐죽삐죽 하늘로 솟아있고 이상야릇하게 생긴 기암괴석들은 오백나한 또는 오백장군이다. 장군은 돌기둥들이 오랑캐를 물리쳐주는 장군의 형상 같다고 해서, 나한은 수백의 아라한들이 서 있는 것 같다고 해 붙여졌다.

초입에서부터 쉬엄쉬엄 1시간 30분 정도를 오르니 하늘이 열리고 전망대(1500m)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서야 영실이 왜 말발굽형 분화구인지를 알게 된다. 영실기암과 병풍바위가 에워싸고 있고 굼부리(화산 분출구)가 영실계곡 쪽으로 터져 있는 것이 오름의 증거다. 비고(389m) 상으로는 제주도 오름 중 산방산(395m)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비고(比高)는 제주도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범위 안의 최고 높이와 최저 높이의 차’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해발고도를 감안하지 않은 오름 자체 높이를 말한다.

선작지왓으로 오르는 등산객들. 오른쪽이 병풍바위다.

 

전망대 부근 왼쪽으로 낮은 키의 주목 군락지가 펼쳐진다. 중간중간 마치 은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흰색의 고사목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나무 위에 앉아있는 까마귀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멀뚱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제주에서 까마귀는 신성한 새다. 제주 사람들은 까마귀가 검은 옷을 입은 무당이라며 까마귀 우는 모습에서 하루를 점친다고 한다. 까마귀가 진화해 떼를 지어 달려들면 무섭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전망대를 지나 병풍바위 위로 난 길을 오르면 더 이상 경사진 데가 없는 구상나무 군락 지대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경관

구상나무숲 사이로 설치된 나무데크 길을 지나면 국내 최고(해발 1600~1700m) 초원지대인 선작지왓이 펼쳐진다. 선작지왓은 제주어로 ‘바위(작지)들이 서 있는 들판(왓)’이라는 뜻이다. 키 작은 관목류가 넓게 분포되어 있고 다양한 식물들이 서식하는 고원 습지여서 생태적 가치가 뛰어나다. 이곳 역시 대한민국 명승((91호)이다. 봄에는 털진달래와 산철쭉이 꽃바다를 이루고 ‘시로미’ 등 희귀 고산식물이 군락을 이룬다. 시로미는 1400m 이상의 고지대에 자라는 늘 푸른 키 작은 식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과 백두산에서만 관찰되는 희귀 고산식물이다. 선작지왓도 조릿대 천국이다. 봄이면 조릿대 사이로 고산식물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있고 그 사이로 털진달래가 듬성듬성하다.

선작지왓 고원. 멀리 백록담 남벽이 보인다.

 

선작지왓 고원에 길게 뻗어있는 나무데크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펑퍼짐한 윗세족은오름 전망대로 올라가는 데크계단이 왼쪽에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선작지왓의 고원 모습과 이름 모를 오름 군락이 파노라마처럼 사방으로 펼쳐진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백록담 화구벽의 모습이 우뚝하고 늠름하다. 백록담 화구벽은 부악(釜岳)이라는 별칭처럼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상이다.

족은오름 전망대에서 내려와 윗세오름 대피소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는 완만한 구릉(오름)이, 오른쪽으로는 서귀포 방향으로 너른 평원이 펼쳐있어 시각적 편안함을 준다. 그 사이로 나무데크가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길을 걷는 맛이 환상적이다. 안구 정화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윗세오름을 처음 올라갔을 때 우리 땅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 산신(山神)께 죄송하다고 빌었다. 우리나라 어디에 이처럼 높은 곳에 시야가 탁 트인 평지 초원이 있을까 싶다. 지평선이 없는 나라에서 너른 평야가 있다 한들 그 끝의 종착지는 모두가 산이다. 그러나 이곳 평원의 끝은 산이 아니라 하늘이거나 서귀포 방향 내리막 지평선이다. 윗세오름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정도로 최고의 자연과 경치를 자랑한다. 스위스 트레킹 경험자로서 경관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스위스 트레킹에 비해 거리가 짧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왼쪽부터 족은오름, 누운오름, 붉은오름. 그 뒤가 백록담 분화벽이다.

 

걷고 쉬고 보고 찍으면서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하니 어느덧 2시간이 흘렀다. 대피소에는 널빤지로 넓게 조성한 휴게장소가 있다. 최근에 다시 설치한데다 크고 넓어 그 자체로 볼거리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잠시 누워있어도 좋다. 윗세오름 대피소는 어리목, 영실, 돈내코 코스가 만나는 교차점이자 종점이다. 윗세오름은 ‘위의 세 오름’이라는 뜻으로 대피소에서 바라보면 고도가 높은 곳에서부터 차례로 보이는 붉은오름, 누운오름, 족은오름을 통칭한다. 세 오름 모두 굼부리(분화구를 일컫는 제주말)가 없는 원추형이다.  붉은오름(해발고도 1740m, 비고 75m)은 세 오름 중 가장 위쪽에 있다. 흙이 유난히 붉어 이름이 붙여졌다. 누운오름(해발고도 1711m, 비고 71m)은 길게 누운 모양에서 이름이 지어졌다. 꼭대기에 망대 같은 바위가 있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오름은 족은오름(해발고도 1699m, 비고 64m)이다.

윗세오름 대피소. 멀리 백록담 남벽이 바라보인다.

 

■중급 코스 : 영실~윗세오름~어리목(8.4㎞)

 

영실로 올라가 다시 영실로 원점회귀하지 않고 코스가 조금 더 긴 어리목 방향으로 하산하면 중급 코스가 된다. 영실에서 올라갈 때 만나는 선작지왓 길도 멋지지만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어리목 방향으로 하산하는 데크길도 매력적이다. 대피소에서 하산 방향을 바라보면 데크 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어리목까지 4.7㎞다. 영실~윗세오름 구간보다 1㎞ 더 길다.

길은 완만한 내리막이다. 다만 중간 지점인 샘터까지만 완만하다가 그때부터 어리목 탐방로까지는 숲속을 걷는 경사 길이다. 윗세오름 대피소~샘터 구간(2.3㎞)은 마치 구도자의 길처럼 느껴진다. 경건함이 느껴지고 행복감이 밀려온다. 자유와 해방의 길이다. 따사로운 봄날이나 가을날,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아무 데크 위에나 누워보라. 호사도 그런 호사가 없다. 가끔은 걷기 편한 데크 대신 다소 걷기 불편한 현무암을 깔아놓은 길도 있으나 구도자의 길이니만큼 그 정도는 참아야 한다. 현무암을 깔아놓은 것은 제주도 전역이 현무암의 땅이니만큼 그걸 느껴보라는 뜻이리라. 뒤돌아보니 상반신이 보이던 백록담 화구벽이 시야에서 시나브로 사라진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1.5㎞ 정도 내려가니 만세동산 전망대다. 만세동산은 예전에 한라산에서 소와 말을 방목할 때 높은 곳에서 소와 말을 감시했다고 해서 망동산으로도 불린다. 만세동산 위쪽으로는 민대가리동산(민오름), 장구목, 백록담 화구벽, 윗세붉은오름, 윗세누운오름이 줄지어 있다. 아래쪽으로는 서쪽 바다까지 길고 넓게 펼쳐진 평원에 마치 경주의 고분군처럼 생긴 여러 오름들이 봉긋봉긋 솟아있다. 삼형제오름, 노로오름, 바리매오름, 쳇망오름, 큰노꼬메와 족은노꼬메오름 등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니 오름의 이름을 알면 주변의 자연이 더욱 친밀하게 느껴진다.

샘터에서 어리목까지 숲은 우거지나 다소 경사가 있다. 속도를 낼 수 없으니 하산 길이 길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은 거대한 어리목 계곡과 목교다. 계곡이 크고 넓어 비가 오면 거대한 계곡으로 바뀔 것이다. 어리목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니 영실 출발부터 6시간이 지났다. 일반 등산객의 4~5시간에 비하면 많이 걸렸으나 그만큼 여유 있게 걸었다는 뜻이니 만족한다.

 

어리목~윗세오름 대피소

이번에는 어리목에서 올라가 보자. 어리목 탐방로 입구(970m)는 크고 깨끗하다. 어리목은 제주말로 ‘길목’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이곳에서 길이 갈라진다. 한라산 백록담 화구벽으로 이어지는 큰 등성이는 윗세오름 대피소(1700m)로, 뒤쪽 작은 등성이는 어승생악 오름(1169m)으로 향한다.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한 어승생악도 다녀올 것을 권한다. 어승생악 정상에 서면 저 멀리 윗세오름 정상부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진다.

어리목 탐방 입구에서 윗세오름 입구로 들어섰을 때 먼저 맞아주는 것은 초록의 조릿대 군락이다. 허리 높이까지 자란 조릿대 숲 사잇길을 10여 분 지나니 어리목 Y자 계곡이다. 그 위에 놓인 목교를 건너고부터 오름길이 시작된다. 급경사가 아닌 데다 나무 데크로 잘 조성해놓아 오르는데 무리가 없다. 조금 더 전진하면 급경사까지는 아니어도 가파르다. 제법 땀이 난다. 초입 기준 2.4㎞, 1시간 20분을 그렇게 올라가니 갑자기 사방이 탁 트인 고원이 나타난다. 사제비동산(1423m)이다.

어리목 코스 초입의 조릿대 군락

 

이곳부터는 널빤지와 침목을 깔아놓은 길이어서 나름 분위기도 있고 발도 편하다. 폭설이 내렸을 때 길을 잃지 말라고 일정 거리마다 길 옆에 꽂아놓은 붉은 깃발이 마치 우리를 위해 도열해 있는 듯하다. 이곳에도 조릿대 군락 일색이다. 구상나무도 드문드문 보이다가 점차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록담의 화구벽이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사제비동산은 시야가 탁 트여 눈이 호강하는 시작점이다. 눈은 계속 행복해하고 입에서는 탄성의 연속이다. 하산사는 사람들 얼굴에 만족감과 행복감이 넘쳐난다.

둘레길 수준의 완경사 길을 40분 정도 걸어가니 만세동산(1606m)이다. 고원은 더 넓어지고 시야는 막힘이 없다. 만세동산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본다. 멀리 서쪽으로는 부드러운 곡선의 오름들이 손짓을 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백록담의 서쪽 화구벽이 웅장한 모습으로 우뚝하다. 연신 카메라 셔터에 손이 간다. 주변은 여전히 조릿대 군락이고 듬성듬성 구상나무 군락지도 있다.

만세동산부터는 길이 비교적 완만하다. 놀멍 쉬멍 하며 걷는다. 약간의 오르막은 양념이다.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하니 어리목 입구에서부터 2시간 30분 걸렸다.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를 비교할 때 영실이 한라산의 웅장함과 진면목을 감상하는 코스라면 어리목 코스는 들머리에서 사제비동산까지 이어지는 울창한 숲, 백록담 화구벽을 향해 올망졸망 솟아오른 수많은 오름 등 제주 특유의 풍광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느낌이 다르다.

 

■고급 코스 : 영실~윗세오름~남벽 분기점~윗세오름~어리목(12㎞ 내외)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갔다가 기운이 넘친다 싶으면 남벽분기점까지 다녀올 것을 권한다. 백록담 분화구의 서쪽 벽을 왼쪽으로 끼고돌아 남벽분기점 전망대까지 가는 환상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대피소에서 남벽분기점 전망대(1600m)까지는 2.1㎞ 거리에 1시간 정도 걸린다. 따라서 왕복 시간은 2시간 정도다.

1700m 내외의 고지인 윗세오름~남벽분기점 길에서 성채처럼 우뚝한 왼쪽 화구벽을 바라보면 운무에 가려졌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날씨가 좋으면 그 멋진 모습을 볼 것이고 기상이 좋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남벽분기점 진행길 방향 오른쪽으로 완만하면서도 규모가 큰, 신라 왕릉의 10배 크기는 족히 될 듯한 오름이 한동안 따라온다. 지금은 여러 번 다녀와 알지만 처음 남벽분기점에 갔을 때는 이름은 모르는데 물어볼 사람이 주변에 없어 답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애오름이다. 모양이 방아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남벽분기점으로 거의 다가갔을 때, 방애오름샘도 있다.

백록담 남벽 분기점으로 가면서 촬영한 화구벽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남벽분기점 전망대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 남벽은 백록담 기준 남벽이지만 전망대 기준하면 북벽이다. 최소한 10만 년 전, 가파르게 흘러내린 용암이 굳는 과정에서 형성된 주상절리가 10만 년 간의 풍화에 휩쓸려 지금은 제각기 다른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남아 있다. 고개를 높이 쳐들고 깎아지른 수직 절벽을 올려다보면 저절로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남벽 왼쪽 옆에도 오름이 있다. 웃방애오름이다. 남벽 전망대에서 백록담 한라산 정상까지는 고도차가 200m다. 국립공단 측이 절벽 오른쪽으로 백록담행 등산길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기약은 없다. 수십 년 전에는 이곳에서 백록담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전망대는 남쪽 서귀포 방향 돈내코로 이어진다. 돈내코 탐방로(고도 500m)는 15년간 길이 막혔다가 2009년 12월 개설되었다. “돈 내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나 이름은 다소 엉뚱하다. 돗(돼지)과 내(하천)·코(입구)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이다. 야생 멧돼지가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계곡이란 뜻이다. 돈내코 탐방안내소에서 남벽분기점으로 올라갈 경우 거리는 7㎞이고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남벽분기점 전망대에 도착한 시간이 늦다 싶으면 그곳 근무자가 “돈내코로 내려가든 윗세오름 대피소로 올라가든 2시에 떠나야 한다”며 다그친다. 한라산 어디나 그렇듯이 윗세오름도 입하산 시간을 통제한다. 동절기(11월 1일~2월 28일)가 중요하므로 동절기 한라산 탐방로별 입·하산 시간을 알아본다. ▲어리목 통제소·영실 통제소는 오후 2시에서 낮 12시로 ▲윗세오름 대피소는 오후 1시 30분에서 오후 1시로 ▲성판악 코스(진달래밭)·관음사 코스(삼각봉 대피소)는 낮 12시 30분에서 12시로 ▲돈내코 안내소는 오전 10시 30분에서 10시로 ▲어승생악 탐방로 입구는 오후 5시에서 4시다. 하산 시간은 ▲윗세오름 오후 4시에서 오후 3시 ▲남벽분기점 오후 2시 30분에서 2시다. 결국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남벽분기점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시간은 오후 1시 30분(하절기)과 1시(동절기)다.

어승생악 정상에서 바라본 어리목 능선과 Y자 계곡

 

■영실·어리목 주차장과 버스 정류장

 

영실과 어리목 모두 한라산 중턱에 있어 등산객 대부분 승용차를 갖고 간다. 물론 홀로 떠나는 등산객 중에는 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어리목 탐방안내소 주차장은 크고 넓어 언제든 주차할 수 있다. 문제는 영실 주차장이다. 영실에는 주차장이 두 곳 있다. 시내버스가 정차하는 아래쪽 주차장(A)과, A주차장에서 거리는 2.5㎞ 고도는 500m 올라간 곳에 있는 탐방안내소 부근 주차장(B)이다.

영실의 두 주차장 모두 크고 넓지만 등산객들이 가급적 등산로와 가까운 B주차장에 주차하기 때문에 B주차장은 휴일의 경우 늦게 도착하면 만차가 된다. B주차장을 놓치면 선택의 여지없이 A주차장에 주차해야 하는데 완만한 오르막길을 2.5㎞(40~5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숲속 아스팔트 길 옆을 걷는 호젓한 길이긴 하지만 등산을 시작하기 전부터 진을 빼는 것이므로 B주차장 확보를 위해 가급적 서둘러야 한다.

또 하나 고려할 것은 들머리(예 영실)와 날머리(예 어리목)를 달리하는 경우다. 승용차를 회수하려면 택시든 시내버스든 들머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내버스는 정류장 위치 때문에 불편하다. 정류장에서 탐방안내소까지 영실(B주차장)은 2.5㎞, 어리목은 0.9㎞ 거리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어리목 정류장은 15~20분, 영실 주차장은 40~50분 정도 걸어야 한다. 합해서 3㎞에 1시간 남짓 거리다. 하산 후 피곤한 몸으로 버스를 타려면 멀다고 느껴질만한 거리와 시간이다. 두 곳을 오가는 택시 비용은 대략 2만 5000원~3만 원 정도다. 그래도 시간을 절약하고 피로를 줄일 수 있어 2인 이상이라면 택시를 권한다.

 

■제주도 오름

 

‘오름’은 ‘자그마한 산’이라는 뜻의 제주도 말이다. 악(岳), 봉(峯), 산(山)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화산 분출이 수반되어야 오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제주에는 한라산 산록에서 해안에 이르기까지 봉긋하게 솟아있는 완만한 봉우리들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 대부분을 오름이라고 보면 된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오름은 엄마·아빠 같은 일상어였으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단어는 오름이 아니라 ‘기생화산’이었다. 한라산의 분화구가 분출을 끝낸 뒤 한라산 기슭 중산간 지대에 있는 마그마가 약한 지반을 뚫고 나와 주변에서 분출되어 생성한 지형이라는 의미다. 제주 땅에는 크고 작은 368개의 오름이 있고 땅 아래에 160여 개의 용암동굴이 있다. 작은 섬 한곳에 이렇게 많은 오름과 동굴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제주가 유일하다.

오름은 들판 한가운데에, 바닷가에, 작은 마을 뒤편에 순하면서도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다보니 제주도 사람들에게 오름은 단순한 지질학적 공간, 그 이상이다. 그래서 죽으면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오름에 올라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인의 삶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오름은 멀리서 보면 대부분 봉긋하게 부푼 모습이지만 막상 올라가보면 저마다의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색다른 자연풍경과 분위기에 빠져 오름 순례하는 ‘오름꾼’도 많다. 오름은 차로 입구까지 갈 수 있어 접근이 쉽고, 올라가는 길이 짧고, 아이들이나 노약자가 갈 수 있을 정도로 편하고, 올라가면 조망이 트인다는 게 매력이다. 몇몇 오름을 빼놓고는 한 번 오르내리는데 1~2시간 정도면 족하다. 10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오름도 많다. 물론 윗세오름처럼 사실상 산행을 해야 하는 오름도 있다. 오름이라도 느낌이 제각기 다르다. 우람한 삼나무 숲을 거느리고 있는가 하면, 너른 초지의 능선으로만 이뤄진 것도 있다. 깎아지른 벼랑처럼 파인 분화구도 있고 부드러운 곡면을 그리는 분화구도 있다.

 

■구상나무

 

구상나무는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우리나라의 자생 품종이다. 덕유산, 지리산 등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높은 산에 사는데 제주도 한라산에 가장 많이 자생하고 있다. 구상나무의 존재를 처음 알게된 서양인은 1907년 제주도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의 포리 신부다. 그는 분비나무와 비슷하지만 잎과 열매의 생김새가 사뭇 다른 상록침엽수를 한라산에서 발견하고는 나무의 표본을 채집해 미국 하버드대 부설 수목원에서 활동하던 식물학자 어니스트 윌슨에게 보냈다. 윌슨은 1917년 제주도를 방문해 한라산 백록담 기슭에 무리 지어 살고 있는 구상나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나무가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은 새 품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한국의 침엽수’를 뜻하는 ‘Abies koreana’라는 학명을 붙여 전 세계에 구상나무의 존재를 알렸다.

윌슨은 제주도 주민들이 ‘쿠살낭’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구상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주도 사투리로 ‘쿠살’은 해녀들이 바다에서 잡는 ‘성게’를, ‘낭’은 나무를 가리킨다. 구상나무의 잎이 성게 가시처럼 생겼다고 해서 ‘쿠살낭’이라고 부른 것이다. 구상나무가 세상에 알려지자 유럽의 식물 애호가들이 제주도를 찾아와 씨앗을 가져가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에서 정원수와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우리는 사용료를 내고 구상나무 품종을 역수입하는 불공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구상나무 관련 재산권이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

구상나무는 서식지와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고사목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기온 상승 추세가 이어질 경우 구상나무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국제자연보전연맹이 ‘위험에 처한 적색목록’에서 멸종위기 종으로 지정하고 국제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식물 중 억울한 사례는 또 있다. 1947년 미국인 식물 전문가가 북한산에서 채집해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한 뒤 ‘미스킴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한 한국 토종 털개회나무(수수꽃다리)가 그것이다. 수수꽃다리는 현재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좋다. 개량된 미스킴라일락은 국내에도 수입된다. 1917년 미국인이 지리산에서 가져간 노각나무는 해외에서 고급 정원수로 탈바꿈했고, ‘하루백합’으로 개량된 토종 원추리 역시 외국에서 인기 있는 우리나라 토종 자원들이지만 지금은 로열티를 물며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 [제주 오름 가봐수까] 시리즈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