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현대 영국 정치 대표하는 세 총리 이야기] ① 윈스턴 처칠… 진영·정파 초월한 전시 연립내각 구성하고 국민 곁을 지키는 행보와 연설로 2차대전 위기에서 나라 구해

↑런던 시내를 걷다가 시민을 향해 ‘V’ 사인을 보내는 처칠 (1943년 6월)

 

by 김지지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추가경정예산안(추경) 관련 시정연설에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은 진영이나 정파를 초월한 전시 연립내각을 구성해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면서 ‘처칠과 애틀리의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윈스턴 처칠과 클레멘트 애틀리가 구현했던 전시 연립내각이 어떤 상황에서 탄생하고 이를 주도한 처칠의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삶을 살펴본다.

 

■ 총리 취임 (1940년)

1938년 9월 아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히틀러에게 넘겨주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을 때 영국 의회와 여론은 “전쟁을 피했다”며 체임벌린을 ‘평화의 사자’로 환영했다. 그러나 같은 보수당 하원의원 처칠은 10월 5일 하원에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완전한 실패작”이라고 혹평했다. 처칠의 평가는 히틀러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하고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2차대전 발발 후 영국도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나 전황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이었다.

1938년 9월30일 독일 뮌헨에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왼쪽)가 아돌프 히틀러와 악수하고 있다.

 

결국 체임벌린은 전쟁 전 대독 정책의 오판을 문제삼은 의회의 불신임으로 1940년 5월 7일 총리에서 퇴진하고 전쟁 발발 후 해군장관으로 입각한 66세의 처칠이 5월 10일 총리로 취임했다. 사실 처칠은 보수당 내에 적이 많았다. 보수당원으로 하원에 입성했다가 1904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1924년 다시 보수당에 복귀해 보수당원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기중심적 스타일이어서 인기도 없었다. 체임벌린조차 “천국의 즐거움을 다 주어도 처칠과 같은 내각에 있고 싶지는 않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처칠이 보수당의 당수와 총리로 선출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보수당 주류가 체임벌리 처럼 대독일 유화 노선을 취한 것과 달리 1933년부터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의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군비 증강을 역설하고 1934년엔 독일 공군기가 런던을 폭격할 가능성이 있다며 영국 공군 전력의 강화를 주장해온 그가 히틀러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가장 적합한 총리로 비쳤기 때문이다.

 

■ 전시 연립내각 구성 (1940년)

처칠은 5월 13일 하원에 출석,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국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와 노고, 땀과 눈물뿐입니다.… 우리의 정책은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동원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처칠의 연설은 성과 없는 협상과 계속되는 패배에 지쳐 있던 의원들을 감동시켰고, 하원은 만장일치로 총리 임명을 가결했다.

처칠은 곧 자신의 보수당과 경쟁 당인 노동당 인사를 막론한 거국 내각을 구성했다. 내치를 담당할 부총리에는 노동당 당수인 애틀리를 임명하고 노동장관과 내무장관 자리도 노동당에 넘겼다. 처칠 자신은 총리와 함께 국방장관, 해군장관을 겸했다. 처칠은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강조한 보수당 수장이고, 애틀리는 주요 산업 국유화와 복지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노동당 당수였으나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함께 손을 잡은 것이다. 처칠은 불같은 성격에 열정적인 태도와 명연설로 사람들을 움직였고 애틀리는 조용한 성격과 침착한 태도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애틀리는 전시 내각을 이끄는 처칠에게 “우리 모두 당신 뒤에 있소, 윈스턴(All behind you, Winston)”이라며 지지했다.

물론 두 사람은 전쟁 경황 중에도 거래의 기술을 발휘했다. 줄 건 주고 챙길 건 챙겼다. 현대 복지국가의 이정표 격인 ‘베버리지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애틀리는 자신의 정치 노선인 복지 확대를 요구했고, 지친 국민을 달랠 필요가 있었던 처칠도 수용했다.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노동부 차관인 윌리엄 H 베버리지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1942년)가 결과물이다. 보고서가 나온 뒤 보수당 재무장관 킹슬리 우드가 재정 문제로 난색을 보였지만, 노동당은 끝내 보고서 공표를 관철했다. 이 보고서가 끌어올린 대중의 복지 열망은 1945년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처칠(왼쪽)과 애틀리

 

■ 히틀러에 맞서 싸워 승리한 유럽 유일 지도자 (1940~1945년)

처칠이 총리로 취임할 무렵, 전황은 암담했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 전 독일에 흡수되었고 폴란드는 이미 지도에서 사라졌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가 차례로 무너지고 덴마크는 4시간 만에 백기를 들었다. 믿었던 프랑스마저 항복 직전이었다.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미국은 중립을 지켰다. 유럽에서 영국은 외톨이였다.

총리 취임 후 결전 의지를 다지는 처칠의 잦은 연설은 영국 국민들에게 위안과 안심의 메시지였다. 처칠은 참전 군인에게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V’ 사인으로 결전을 독려하고 국민에게는 “만약에 대영제국이 천년을 간다면 사람들은 ‘그때가 가장 좋은 시대였다’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시민을 향해 ‘V’ 사인을 보내는 처칠

 

그래도 전황이 워낙에 불리해 전시 내각 안에서 나치와 협상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처칠은 각료 전원을 소집해 사자후를 토했다. “협상을 시작하면(중략) 결국 영국은 노예 국가로 전락합니다. 영국이 최후를 맞아야 한다면, 우리 모두 땅 위에 쓰러져 자기 피로 질식해 죽은 후라야 합니다.” 애틀리 부총리도 협상을 주장하는 노동당 장관들을 질책했다. 결국 거국 연립내각에서 협상론은 사라졌다. 처칠을 비롯한 전시 내각은 1940년 10월 15일 독일 전투기가 총리 공관을 폭격하자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區)에 있는 지하 벙커로 장소를 옮겨 전쟁을 지휘했다. 이곳에서 처칠은 새벽까지 전황보고를 받고 연설문을 썼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밀담을 주고받았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 능력 발휘

전시 중인데도 처칠은 ‘항상 눈에 보이는 지도자’였다. 국민은 군수공장, 폭격 맞은 집, 군인 막사 등을 방문해 국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처칠의 모습을 신문에서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지도자가 항상 자신들 가까이 있음에 안도하고 친근감을 느꼈다. 영국인들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체력을 발휘하는 처칠을 파시스트 독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파수꾼으로 여겼다. 전쟁 중 처칠의 인기는 한 번도 78%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문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탓에 전쟁 물자를 구입할 돈도 운송할 여력도 없었다는 점이다. 미국에 손을 내밀었으나 당시 미국의 무기수출법은 대금 선불과 구입자 운송이 원칙이었다. 처칠은 참전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루스벨트 미 대통령을 ‘보스’로 치켜세우고 자신은 ‘부관’이라고 낮추며 무상 무기 제공과 운송을 미국에 요청했다. 루스벨트를 설득하기 위해 거의 2,000여 통의 전보와 편지로도 구애작전을 펼쳤다. 루스벨트는 의회를 설득한 끝에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전쟁물자의 대외 원조 및 대여에 관한 실질적 권한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310억 달러어치 무기를 공급받았다.

1941년 12월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연이어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소련은 이미 그해 6월부터 상호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침공해온 독일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결국 1945년 5월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렇듯 처칠은 전쟁에서 히틀러와 나치스에 맞섰던 유럽 유일·최후 지도자였다.

독일의 공습으로 폭격맞은 집을 둘러보는 처칠

 

■ 총선 패배와 총리 퇴임 (1945년)

1945년 5월 전쟁이 끝났을 때 처칠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아 국민들로부터 80%라는 큰 지지를 받았다. 처칠은 보수당 단독으로도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이 우위를 보였다. 그런데도 처칠은 노동당이 참여한 거국 내각을 해산하고 7월 5일 총선거를 단행했다. 승전의 주역이었으니 당연히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노동당 47.7%, 보수당 36.2%로 노동당의 압승이었다. 보수당은 전체 의석의 반도 안되는 197석을, 노동당은 무려 393석을 차지했다.

노동당의 압승 배경은 6년 가까이 지속된 전쟁이 끝나고 그 과정애서 피폐해진 삶에 지칠대로 지친 유권자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호로 전후의 복지국가를 약속하는 노동당의 선거 메시지에 더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이다. 인기가 높던 처칠 대신 보수당의 전 총리 스탠리 볼드윈과 네빌 체임벌린의 실정을 지적한 선거전략도 주효했다.

처칠은 선거에 패배했지만 아직 임기가 남아 있어 1945년 7월 17일부터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7월 26일 애틀리가 총리로 취임하고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자 처칠은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라는 교훈을 스탈린에게 가르쳐주듯이 회담 도중 포츠담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세 거두. 왼쪽부터 처칠 영국 총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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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삶 (1874~1965년)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유서 깊은 말보러 공작가(家)의 후손으로 옥스퍼드 북서쪽의 소도시 우드스톡의 블레넘궁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총독, 아버지는 재무장관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었으며 어머니는 뉴욕 출신 백만장자의 딸이었다. 다만 훗날 처칠이 물려받은 유산은 거의 없었다. 처칠은 조산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하고 말이 어눌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매력적인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작은 키에 뚱뚱했으며, 등이 굽은 데다 대머리였다. 목은 거의 안 보였고 입술은 얇았다. 20세기 영국 정치사에 유일하게 귀족 혈통을 이어받은 총리였지만, 외모만은 결코 귀족적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말썽꾸러기에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귀족 자제들이 의례적으로 입학하는 옥스퍼드대나 케임브리지대에는 입학하지 못하고 2번의 낙방 끝에 1893년 왕립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다행히 사관학교는 처칠에게 맞았다. 조상인 말버러 공작처럼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허약한 체력과 부족한 공부를 메우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처칠은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장교 임관 후에는 쿠바와 인도 등지의 전투에 4차례 참가했지만 전공을 세우거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사관생도 시절의 처칠

 

처칠의 이름이 영국에 널리 알려진 것은 1899년 ‘모닝 포스트’지 특파원으로 남아공의 보어전쟁에 종군했을 때였다. 당시 그는 탈선한 열차에서 부상병을 구하려다 포로가 되었으나 한달만에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적진을 뚫고 480㎞를 걸어 남아공의 더반으로 돌아왔다. 이 극적인 탈출기가 신문에 연재되고 이것이 화제가 되어 1900년 7월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처칠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종군기자로 서울에도 왔다. 5년 전 보어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그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국제 분쟁 현장을 뛰어다니던 때였다. 그 일을 증언하는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회고가 남아 있다. 장 전 총리가 처칠을 처음 만난 것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서였다. “그분이 ‘나는 1904년 러일전쟁 시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 특파원으로 만주로 가는 길에 한국을 찾아 프랑스 여성이 경영하는 손탁호텔에 하룻밤 유숙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에든버러대 선후배인 두 사람은 이듬해 영국왕 조지 6세의 장례식장에서도 그때 얘기를 다시 나눴다.

 

62년 간 하원의원으로 활동

처칠은 덕분에 그해 치러진 선거에서 26살의 나이에도 보수당 소속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920년대의 2년을 제외하고는 1964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62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904년에는 보수당 정부가 보호관세 정책을 취한 것에 반발, 자유당으로 소속 정당을 바꾸었고 1905년 통상장관으로 입각했다. 1908년 9월, 11살 아래 클레멘타인 호지어와 결혼했는데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인 클레멘타인은 이후 처칠에게 반려자 이상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안식처, 그리고 친구였다. 부부는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헤어져 있을 때는 서로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은 1남 4녀를 낳으며 56년간 해로했다.

결혼 무렵의 처칠 부부

 

처칠은 1911년부터 5년간 해군장관을 맡게되자 군함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고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 도입을 기획하는 등 해군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적국인 오스만 투르크 수도 이스탄불 근처에 영국군(주로 호주·뉴질랜드 출신 부대)을 상륙시키는 갈리폴리 작전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가 20여 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그는 하원의원인데도 현역 군인으로 복귀해 1915~1916년 부대 대대장으로 최전방에서 싸웠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서 갈리폴리 작전 실패를 만회하고 꺼져가던 정치 생명을 되살릴 수 있었다.

1917년 다시 입각해 군수장관, 육군장관, 식민장관을 차례로 역임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으나 1차대전 종전 뒤 자유당의 인기가 떨어져 1922년 총선에선 패배했다. 1923년 보궐선거에서도 의회에 복귀하지 못했다. 결국 인기 없는 정당 간판으로는 더 이상 당선되기 힘들다는 현실적 이유와 자유당 정부의 지나친 친소련 정책이 못마땅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1924년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 간신히 당선되었다. 1925년, 21년만에 보수당으로 복당한 뒤에는 재무장관으로 활동하면서 1925년 파운드화의 금본위제도를 부활시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책은 심각한 디플레이션과 실업, 노동자 파업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총파업에 나선 노조를 강경 진압했다가 격렬한 비난을 초래해 자신은 물론 보수당의 지지도까지 떨어뜨렸다. 처칠은 1차대전에 인도 병력을 참전시키는 대가로 약속했던 인도의 자치권 확대, 심프슨 부인과의 스캔들로 곤경에 빠진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양위 등에도 반대했다.

 

독일의 위험성 경고하면서 군사력 갖춰야 한다고 주장

보수당이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해 야당이 되자 처칠은 총선 책임론에 시달렸다. 보수당이 1935년 재집권했을 때도 처칠은 내각 기용에서 철저히 외면당해 다선 평의원으로 ‘정치적인 황야’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처칠은 나치 독일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언제라도 무력을 쓸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런 전력을 인정받아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또다시 해군장관을 맡아 10년만에 내각에 복귀하고 1940년 5월 총리로 취임했다.

1945년 7월 총리에서 물러난 처칠은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2차대전이 끝나 안락과 풍요에 젖어있는 미국인을 향해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3월 5일 트루먼 대통령까지 참석한 미국 웨스터민스터대에서 처칠은 “발트해의 스테틴으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지고 있습니다.”며 소련의 팽창을 경고하는 이 ‘철의 장막’ 연설로 처칠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확인시켰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구권이 차례로 소련 공산주의 수중에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는 용어로 명쾌하게 정의한 이날의 연설은 냉전시대의 개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냉전 기간 중 처칠은 소련을 끝까지 경계했다. 1947년 미국 방문 중에는 소련의 야심을 가만히 두면 더욱 커질 것을 염려해 아예 싹을 자르자며 공화당 정치인에게 “러시아에 원자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 총리 복귀(1951년)와 퇴임(1955년)

1945년 7월 총리 자리를 꿰찬 애틀리는 취임 후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복지국가, 계획경제를 국정 3대 지표로 삼았다. 자유시장을 중시하는 경제 기조에서 시장을 통제하는 쪽으로 전환, 영국중앙은행, 광산, 철도, 전기 등 기간 산업을 국유화하고 의료·주택·연금·실업 수당 등 복지 정책을 제도화했다. 특히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호로 요약되는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도 영국이 자랑하는 국민건강시스템(NHS)이다. NHS는 세금을 재원으로 전 국민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획기적인 정책이다. 이런 그에게 오늘날까지 따라붙는 수식어가 ‘영국 전후 질서의 설계자’ ‘영국을 복지국가로 전환시킨 주역’이다.

그러나 19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영국민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좌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인기를 잃어갔다. 보수당은 ‘국민을 풀어주라(Set the people free)’라는 구호로 노동당의 계획경제와 국유화 정책을 비난했다. 결국 애틀리와 노동당은 1951년 10월 총선에서 20만표라는 박빙의 표차로 정권을 보수당에 넘겨줘야 했다.

1951년 10월 26일, 6년만에 총리 자리에 복귀한 처칠은 정권을 잃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다양한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매년 30만 채의 서민주택을 공급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주택난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공산주의 세력 확대에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1948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말레이 식민지(현 말레이시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인 말레이민족해방군의 게릴라전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증파해 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80세가 넘는 노령으로 국정을 수행하기에 무리였다. 결국 1955년 4월 7일 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하원의원으로 남아 있다가 1964년 의원직에서 물러나고 1965년 1월 21일 91세로 타계했다.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군왕은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했다. 애틀리도 팔순의 몸으로 1월의 찬 바람 속 운구 행렬에 참여했다.

 

■ 정치인 이전에 작가

처칠은 정치인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에세이와 시사평론 등을 신문에 기고하고 소설, 전기, 역사서 등을 집필한 작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며 평생 수십권의 책을 썼다. 덕분에 유산 없이 30대에 이미 인세와 강연 수입으로 생활은 풍족했다. 이후에도 많은 저작을 남겨 평생 동안 하루에 8대의 시가를 피우고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고급 저택을 짓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처칠은 “평생 먹고살 돈을 혀와 펜으로 벌었다.”

처칠은 91살의 생애를 통해 43종 72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의 유일한 소설 ‘사브롤라’를 빼고는 모두 기록물들이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 ‘영어 사용 국민들의 역사’ ‘2차대전 회고록’ 등 20여 권에 이르는 역사서도 집필했다. 그중 ‘2차대전 회고록’(전 6권)은 1953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다.

2차대전 회고록

 

2002년 영국 BBC방송이 100만 명 이상의 영국인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을 조사했을 때 셰익스피어나 뉴턴, 엘리자베스 1세 등을 제치고 당당히 1위에 꼽혀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과 신뢰를 받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처칠이 지금까지 영국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귀족 집안 출신인데도 귀족 티를 내지 않고 평민들 속에서 평민들처럼 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는 상원으로 갈 수 있는 ‘런던 공작’이라는 귀족 칭호를 수여하겠다는 여왕의 제안을 사양하고 은퇴하는 날까지 하원에 남았다. 죽기 전, 영국 정부가 웨스트민스터사원에 처칠의 자리를 마련했는데도 그냥 자신의 고향 마을 블레이던의 조그만 교회의 가족묘지 부모 옆에 묻혔다. 결혼도 영국 귀족들이 상시로 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닌 평민교회에서 했다. 여기에 난독증에다 말더듬이인 인간적인 약점도 작용했다. 다만 평생 우울증에서만은 벗어나지 못했다.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개’라고 불렀다. 이런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 택한 것이 그림이고 샴페인이고 시가였다.

그림은 영국 예술원 회원으로 이름을 올릴 만큼 출중하고 죽을 때까지 500여점이나 남겼으나 자신을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아 작품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 처칠은 애연가이고 애주가였다. 브랜디 같은 독주도 즐겨 마셨지만, 샴페인을 더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폴 로저(Paul Roger)’를 유독 사랑해서 축하할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이 샴페인을 마셨다. 처칠 서거 10주기인 1975년, 폴 로저는 그를 기려 ‘SIR WINSTON CHURCHILL’이란 이름의 최고급 샴페인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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