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현대 영국 정치 대표하는 세 총리 이야기] ③ 마거릿 대처… ‘대처리즘’ 강행으로 ‘영국병’ 고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양극화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적지 않아

↑ 마거릿 대처

 

by 김지지

 

■‘유럽의 병자’로 불린 1970년대 영국병

1970년대 영국은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무소불위 권력이 야기한 지속적인 임금상승과 생산성 저하 등으로 경제가 침체했다. 결과는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영국병’으로 나타났다. 2차대전 후 번갈아 정권을 잡은 노동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 모두 과도한 복지국가 패러다임에 빠지고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시대정신’으로 간주한 게 주요 이유였으나 경중을 따지자면 복지정책을 우선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강성 노조에 힘을 실어준 노동당 정부에 더 많은 책임이 있었다.

노동당 정부는 복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고액의 세금을 부과하고, 국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보살펴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하며 서서히 일과 담을 쌓았다. 결국 영국은 ‘유럽의 병자’라는 치욕스런 별명을 듣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도 강성 노조의 권력은 여전했다. 실례로 1978년 겨울 시작된 공공부문 근로자들의 총파업은 영국 사회 시스템의 작동을 중단시켰다. 이 ‘불만의 겨울’ 동안 전국의 교통망이 마비되고 쓰레기가 넘쳐났으며 시신도 매장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때 해결사로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1925~2013)였다.

 

■총리가 되기 전 대처의 삶

대처는 영국 중부 소도시 그랜섬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대처가 어렸을 적 그랜섬 지역의 시의원과 시장으로 활동하고, 대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어 대처가 미래의 보수 정치인으로 성장하는데 싹을 틔워주었다. 아버지의 말씀 중, 대처가 평생 기억하는 것은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는 가르침이다.

대처가 태어난 그랜섬의 잡화점(왼쪽)과 대처의 10대 초반의 모습

 

대처는 1948년 옥스퍼드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1950년 보수당 후보로는 불리한 다트포드에서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하지만 ‘보수당 유일의 여성 후보’, ‘전국 최연소 여성 후보’라는 사실이 알려져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대처는 1951년 12월, 10살 연상의 이혼남이면서 자칭 성공한 사업가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고 1953년 남녀 쌍둥이를 낳은 뒤 남편의 후원 속에 사법시험을 준비해 1954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34살이던 1959년, 마침내 런던 북부 핀츨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960년 맥밀런의 보수당 정부에서 연금·국가보험 정무차관을 맡았다. 1964년 보수당이 노동당에 정권을 빼앗긴 뒤에는 야당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 이력을 쌓았다.

결혼할 때(왼쪽)와 쌍둥이 아들과 딸을 안고 있는 대처 모습

 

1970년 보수당이 다시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는 에드워드 히스 정부에서 교육과학장관 직을 수행하며 공직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교육과학장관 때인 1971년, 취학아동들에게 무상 지급하던 우유를 유상으로 전환해 ‘우유 도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974년 총선 패배로 히스 내각이 무너지자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오직 당의 쇄신이 중요하다는 일념으로 보수당 당대표에 도전, 1975년 2월 영국 정치사상 최초로 여성 당대표 자리를 거머쥐었다.

대처 당대표는 철저한 반공·반소 노선을 견지했다. 1976년 1월 ‘영국이여 깨어나라’ 제목의 연설에서 소련의 군사력 증강 뒤에 숨은 침략 야욕을 신랄하게 비판했을 때 소련의 한 신문이 대처를 ‘철의 여인(The Iron Lady)’이라고 칭하면서 대처는 평생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별명을 얻었다. 대처가 보수당의 당대표로 활약하던 1978년 말~1979년 초, 영국은 공공부문 노조원들의 대대적인 파업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른바 ‘불만의 겨울’로 불리는 총파업으로 학교·공항·병원 등의 시스템이 전면 마비되었다. 국민들은 계속되는 파업 사태를 지켜보면서 비로소 공공부문 노조가 지나치게 비대하다고 인식, 1979년 5월 3일 총선에서 보수당에 339석(43.9%)을 안겨줌으로써 보수당이 268석의 노동당을 무너뜨리고 집권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선거 승리에 따라 대처 당대표는 마침내 영국은 물론 서구 역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 자리에 올랐다.

총선에서 승리한 다음날 총리 관저(다우닝가 10번지)로 들어가면서 손을 번쩍 들어올린 대처

 

■대처 총리

 

▲경제 발전 가로막는 규제들 과감하게 철폐

대처 총리 앞에 놓인 것은 두 자릿수의 인플레와 낮은 경제성장률, 그리고 고질적인 노사분규였다. 대처는 무덤까지 챙겨주는 복지정책이 영국인들의 근로정신을 빼앗고, 노조의 강경 노선이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진단했다. 대처는 영국병 치료를 위해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규제들을 과감하게 철폐하거나 완화하고 재정지출은 대폭 줄였다. 일련의 고용법과 노동조합법을 차례로 개정, 불법 파업을 저지른 노조에 벌금을 부과하고 불법 파업으로 생긴 비용을 면제해주던 관행을 폐지했다.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만 고용할 수 있게 한 클로즈드숍 제도의 지나친 보호 조항도 개정했다. 이에 따라 노조는 파업 여부를 두고 사전 투표를 해야 했고 노조 결정에 반대할 수 있는 개별 근로자 권리는 확대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조가 총파업을 벌이면 정부가 개입해서 사태를 수습하는 관행을 깼다. 단적인 예가 1980년 철강노조의 파업이었다. 파업은 대처가 기용한 이안 맥그리거가 적자투성이인 영국철강의 구조조정을 시도한 것이 발단이었다. 맥그리거가 적자 공장들을 폐쇄하자 노조는 파업으로 응수했다. 경영진과 노조는 관행대로 정부의 개입을 기다렸다. 하지만 대처 정부는 영국철강의 노사분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자 철강노조는 다른 기업의 노조들까지 끌어들이는 ‘동조파업’을 유도했고,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그래도 대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철강 노조는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인상과 생산성 향상에 협조하는데 합의했다. 이후 영국철강은 적자 공장들은 문을 닫고 대대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식의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만성적인 부실을 털어내고 견실한 기업으로 거듭났다.

대처에게 영국철강 노조와의 대결은 시작이었다. 대처는 언젠가 맞붙게 될 더 큰 격전을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데 골몰했다. 문제는 영국병이 고쳐지기는커녕 경제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실업률은 치솟고 인플레율은 한때 20%를 넘어섰다. 하지만 경제는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대처의 인기도 서서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1981년 12월 갤럽조사에선 지지도가 25%로 곤두박질쳤는데 여론조사가 시작된 이래 현직 총리의 지지도가 이렇게 낮은 적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동당 당대표의 인기가 대처보다 낮았다는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위기에 처한 대처를 구해준 것은 1982년 4월 발발한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당시 포클랜드 섬(아르헨티나는 말비나스섬)에는 약 1200명의 영국계 거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나 영국에서 1만 3000㎞나 떨어져 있어 영국엔 그다지 중요한 섬이 아니었다. 480㎞ 거리의 아르헨티나에 포위 상태로 있느니 아르헨티나와 타협하는 편이 주민에게도 현실적으로 나았다. 대부분 영국인들도 포클랜드가 어디 붙어있는지 몰랐다. 1981년 국방장관이 국방비를 절감할 목적으로 남대서양 순찰선인 인듀어런스호를 철수하자고 제안했을 때 대처가 외무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방장관의 손을 들어줄 정도로 포클랜드는 사실상 방치상태였다.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이것을 영국이 물러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섬을 기습점령했다. 대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현실적으로 영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군사적으로 대응했다가 자칫 재정 파탄이 날 수도 있어 내각의 각료들조차 포클랜드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런데도 전 국민의 80% 이상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포클랜드를 찾아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처는 이런 여론을 무기로 삼아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함대를 파견했다. 전략적 가치라곤 전혀 없는 12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섬들을 재점령하려고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이후 일진일퇴의 전투 과정에서 영국군 250여명이 죽고 770여명이 다쳤다. 아르헨티나는 640명 전사에 1060여명이 부상했다. 결국 아르헨티나군이 개전 75일만인 6월 14일 항복함에 따라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대처는 전쟁이 끝난 뒤 255명 전사자 가족 모두에게 자필로 위로의 편지를 보내 국민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포클랜드 동쪽 섬을 가로질러 행군한 후 스탠리항으로 접근하는 영국군

 

▲레이건 미 대통령과 2인3각 외교 펼쳐

포클랜드 전쟁 승리 후 대처의 지지율이 2배 가까이 치솟은 덕분에 대처는 1983년 6월 총선에서 또다시 승리했다. 이후 ‘대처리즘’이 서서히 효력을 발휘하고 경제가 활기를 띠었다. 대처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하며 다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대처는 외교적으론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의 두 정상은 신자유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반소·반공에서 일치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두 지도자의 경제정책도 세금 감면, 작은 정부, 사회복지 축소, 구조개혁 등 공통점이 많았다. 특히 두 지도자는 소련 중심의 공산권에 맞서 군비 증강에 적극적이었다. 대처는 1983년 미국의 순항미사일을 유럽 최초로 영국에 배치하고, 1985년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을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지지했다. 1986년에는 리비아 공격을 위해 미군 폭격기의 영국 공군기지 사용을 허가했다. 대처는 미국의 레이건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두 지도자를 여러 차례 만나고 신뢰 관계를 쌓아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레이건 미 대통령과 대처 영국 총리

 

▲탄광노조와 결전

소련이 대처의 국외 상대라면 국내 상대는 10년 전 보수당의 히스 정권을 무너뜨린 역대 최강의 탄광노조였다. 과거 보수당의 해럴드 맥밀런 총리(재임기간 1957~1963)가 영국에서 총리조차 손대지 못하는 세 집단으로 가톨릭교회, 근위여단, 광부를 꼽을 만큼 탄광노조는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1969년, 1974년, 1979년 세 차례나 정부가 바뀐 것도 노조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1980년대 들어서는 공산주의자 아서 스카길이 탄광노조 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세계 최강 노조’ 소리를 들었다. 대처는 스카길이 탄광노조 위원장에 뽑혔을 때부터 곧 다가올 스카길과의 결전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먼저 노조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을 석탄공사 사장으로 기용했다. 3년 전 영국철강 사장으로 철강노조 파업에 굴하지 않고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이안 맥그리거를 1983년 9월 석탄공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맥그리거는 3년 전에도 그랬듯이 채산성이 떨어지는 탄광들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처는 탄광이 파업할 때 가장 큰 문제가 석탄발전소이기 때문에 석탄 재고량을 충분히 확보하도록 내각에 지시했다. 석유, 원자력, 가스 발전소도 언제든 시설을 가동할 수 있도록 대비시켰다. 대처 정부가 마침내 칼을 빼든 것은 “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탄광 20개를 폐쇄하고 2만 명의 광원을 줄이겠다”는 석탄산업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한 1984년 3월이었다. 탄광노조는 석탄 매장량이 바닥날 때까지 탄광을 폐쇄할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아서 스카길

 

탄광노조, 대처의 강경책으로 363일만에 파업 중단하고 무릎 꿇어

문제는 스카길의 파업 결정이 독단적이고 불법적이라는 점이었다. 스카길은 파업에 대한 조합원들의 지지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나자 찬반투표 규정을 무시하고 불법파업을 강행했다. 이는 보수당 정부에 찬반투표 없는 불법파업이란 공격의 빌미를 마련해줬다. 또 하나는 노조의 내부 분열이었다. 탄광 폐쇄 가능성이 낮은 지역의 노조들은 물론, 탄광노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지역노조들조차 스카길의 독단에 반기를 들었다. 철강노조, 운수노조, 부두노조 등은 물론 노동조합총회도 스카길의 편을 들기를 거부했다.

정부는 불법파업이라는 이유로 노조 재산을 압류하고, 지도부에는 벌금을 부과했다. 파업 조합원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고, 사택지구의 전기와 수도가 차례로 끊겼다. 그러자 스카길은 전위조직을 앞세워 폭력시위를 일삼았다. 파업에 동조하지 않는 노조원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처자식들을 협박했다. 1984년 11월에는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출근하는 광부들이 탄 차량에 콘크리트 더미를 던지는 만행을 저질러 운전기사가 즉사하고 여러 명의 광부들이 크게 다쳤다. 대처는 ‘폭도의 지배’와 ‘법의 지배’ 중 어느쪽을 택할 것인지를 국민들에게 요구하면서 단호하게 대처했다. 결국 스카길을 비롯해 수백명이 체포되자 스카길은 1985년 3월 3일, 363일간 이어진 파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무릎을 꿇었다. 그 기간, 파업과 관련한 공무집행방해와 폭력, 방화 절도 등으로 기소된 건수만 무려 1만여 건이나 되었고, 정부 추산 경제적 손실은 국내총생산의 1%에 달했다. 언론은 대처의 강경노선을 승리 요인으로 부각했지만 사실 노조의 내부 분열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대처에게는 운도 따른 승리였다.

대처가 그 다음 겨냥한 것은 ‘작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국영기업의 민영화였다. 대처는 국영기업이야말로 영국병의 또 다른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기업가 정신’을 박탈하고 국민의 정신을 썩게 만든 것이 국영기업이라고 믿었다. 국영기업 민영화는 재임기간 11년 내내 추진되어 40개사를 민영화했다.

 

■대처리즘의 명암

탄광노조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과 승리 그리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이후 1979년 17%이던 영국의 인플레율은 1985년 9%를 거쳐 1987년 무렵 5% 이하로 떨어졌다. 1980년 마이너스 4%를 기록한 국내총생산은 해마다 증가해 1988년 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경기 호전과 인플레 억제 성공으로 1987년 6월 총선거는 또다시 보수당과 대처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세계최초로 이름에 ‘이즘(-ism)’을 붙인 대처리즘이 전 세계 언론을 탔다. 대처리즘은 정부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시장 자율화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골자는 재정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정책은 영국을 송두리째 바꾸면서 ‘영국병’을 고쳤다는 평가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처리즘이 한때는 효능을 발휘했는지 몰라도 만병통치약일 순 없었다. 결국 막강하던 대처리즘도 대처 집권 3기에 들어서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변했는데 대처가 과거 방식만을 고집하고 독선에 빠진 게 문제였다. 1987년 선거 후 실시한 급격한 금융규제 완화가 과잉 부동산 투자 및 신용판매 붐으로 이어지더니 결국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빈부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거리에는 부랑아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던 중 1990년 4월 세제 개혁의 총결산으로 도입한 ‘인두세(주민세)’도 대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소득이나 재산규모와는 상관없이 동일 세율을 부과하는 인두세에 대한 항의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보수당 내에서도 이견이 터져나왔다.

게다가 대처가 각료들을 하인 부리듯 해 반발을 사면서 당대표를 새로 선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터져나왔다. 결국 1990년 11월 20일 당대표를 뽑는 투표가 진행되었다. 대처는 승리했지만 과반을 얻지 못해 2차 투표에 들어갔다. 그러나 투표 시작 전, 각료들의 출마 포기 요구에 밀려 결국 대처는 2차 투표를 포기하고 11월 22일 퇴진했다. 그의 퇴진은 전 세계에서 20세기 최장수 총리의 퇴진이었다. 대처는 퇴임 후 하원의원 신분으로 돌아갔다가 1992년 선거에 불출마하면서 의원직도 사퇴했다. 대처 이후 등장한 토니 블레어(노동당) 총리와 데이비드 캐머런(보수당) 총리 등은 당적을 불문하고 대처리즘의 영향을 받은 ‘대처의 아이들’로 불린다. 특히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인데도 대처의 ‘비판적 계승자’ ‘대처의 적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애증의 대상

대처는 자신이 하는 일 모두 국가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옳다고 믿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으나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고집불통이었다. 그러다보니 취미는 정치 뿐이었고 친구는 남편 뿐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자신의 여성성을 거부함으로써 여성 관련 법안이나 여성 인권 향상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첫 여성 총리이면서도 11년 집권 기간 내각에 한 명의 여성 각료도 없었다.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고 국민에게는 극단적 애증의 대상이었다. 일 중독증과 남을 믿지 못하는 천성 때문에 ‘이 길밖에 없다’ 식의 독단 탓에 온갖 악담을 들어야 했다. 2013년 4월 8일 타계했을 때 장례식을 앞두고 런던 중심가 트래펄가 광장에서 수백명이 모여 ‘반(反) 대처’ 시위를 벌인 것도 대처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이들은 대처가 총리 재임 기간 시행한 공기업 민영화와 복지 축소 등의 정책이 실업과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망자를 향해 시위를 벌였다. 특히 이들이 부른 노래 ‘딩동! 마녀가 죽었다(Ding Dong! The Witch is Dead)’는 영국 음원 차트 상위권을 휩쓸기도 했다.

대처가 등장한 TV시리즈와 영화는 40여편이나 된다. 작품마다 대처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을 오갔다. 그는 진정한 여성 정치인의 길을 닦은 개척자로 영웅시되기도 한 반면, 영국의 경제 양극화를 불러온 악마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처가 영국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자본주의 작동 원칙을 국민에게 가르쳐 현재 영국의 초석을 쌓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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