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의 강대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중재에 나서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도록 한다. 아프리카 서쪽 끝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카보베르데 제도 주변을 동서 경계선으로 갈라 스페인에는 경계선 서쪽을, 포르투갈에는 동쪽을 차지하게 했다. 동쪽을 차지한 포르투갈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인도 항로로 향료를 들여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인도 항로로 다닐 수 없었던 스페인은 서쪽으로 인도까지 가는 길을 찾지 않는 한 향로 무역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발보아가 1513년 파나마 서쪽에서 태평양을 바라보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너른 바다인지 알 수 없었고 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빠지는 바닷길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 무렵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인도항로 등에서 무역을 배운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조국을 등지고 스페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모로코에서 있었던 현지 무어인과의 거래를 포르투갈 왕이 의심했기 때문이다. 마젤란이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의 명을 받아 5척의 범선과 270여 명의 탐험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세계일주 탐험에 나선 것은 1519년 9월이었다.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남위 52도50분 지점에서 알 수 없는 한 해협으로 들어선 것은 출항 후 1년 여 만인 1520년 10월 21일이었다. 훗날 ‘마젤란 해협’으로 명명된, 남미 대륙의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지나는 해협이었다.
1개월이나 지났을까. 11월 28일 갑자기 저멀리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태평양이었다.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가보는 뱃길이었으나 곧 인도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던 희망은 가도가도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서 실망으로 바뀌었고 그 실망은 점차 절망으로 바뀌었다. 온갖 고초 속에서도 마젤란은 그 바다를 ‘평화로운 바다(太平洋)’로 이름지었다. 99일 만에 괌섬을 만나고 곧 필리핀에까지 이르렀으나 결국 마젤란의 묏자리가 되고 말았다. 필리핀 종족 간의 싸움에 휘말려 41세로 생애를 마친 것이다.
나머지 탐험대는 출항 3년만인 1522년 9월 8일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나 살아돌아온 것은 한 척의 배와 18명의 선원뿐이었다. 곧 지구가 둥글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었으며 그 너머에는 세상에서 제일 큰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