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6·25 전쟁’ 발발 70주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10대 장면 ⑨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⑩ 빨치산 대토벌

↑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이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이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by 김지지

 

⑨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7월 10일 첫 본회담이 열린 곳은 한때 고급 요정이던 개성의 내봉장

6·25전쟁 휴전 논의는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수원까지 장악한 1951년 1월 영국, 캐나다, 인도 등이 ‘현위치 휴전안’을 유엔에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위치 휴전’이란 수원 이남까지 중공군과 북한군이 진출한 상태의 휴전이므로 이대로 휴전이 성사되면 서울이 공산군 수중에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현위치 휴전안’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우방국인 영국이 휴전을 주도해 공개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들어 엄청난 전쟁경비를 쓰고 3만여 명의 전사자까지 나와 미국 내 여론도 좋지 않았다. 미국이 마지못해 휴전안을 지지하자 유엔 정전위원회가 1951년 1월 13일 휴전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런데 중공이 4일 뒤 휴전 결의안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승승장구하던 당시 전황에 취해서 미국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휴전안을 거부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결국 휴전안을 제안한 나라들은 미국의 노선으로 복귀해 2월 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유엔 결의에 동참했다.

이런 가운데 유엔군이 다시 북상, 전선이 38도선을 경계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미국은 1951년 5월 중순 38도선을 경계로 한 휴전선을 공식 정책으로 확정했다. 그리고 미국의 소련 문제 전문가 조지 케넌이 1951년 5월 31일 야콥 말리크 주유엔 소련 대사에게 휴전협상을 타진했다.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도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면서 휴전 논의에 힘을 실어주었다. 6월 23일 말리크가 교전 당사자 간의 대화를 제안하고, 며칠 뒤 미·중이 지지를 표명하면서 휴전 논의가 성사되었다.

7월 10일 첫 본회담이 열린 곳은 한때 고급 요정이던 개성의 내봉장이었다. 미 극동 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제독을 수석대표로 한 유엔군 측에서는 미군 장성과 백선엽 소장 등 5명이 참석했다. 공산군 측에서는 남일 조선인민군 참모장과 이상조 등 3명의 북한 장성과 중공군 장성 2명이 참석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회담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앞에서 포즈를 취한 5명의 유엔군 측 대표들. 왼쪽부터 미 극동해군 참모부장 알레이 버크 해군 소장, 미 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렌스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해군 중장(수석대표),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미 8군참모장 행크 호디스 육군 소장

 

회담 첫날 공산군 측이 “안전을 이유로 양쪽이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나오자”고 제의해 유엔군 측이 백기를 들고 회담장에 들어서자 공산군 측은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유엔군이 굴복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게다가 회담장에서 자기들은 높고 곧은 의자를 사용하면서도 유엔군 측에는 낮은 안락의자를 제공하는 등 유치한 신경전을 벌였다.

1951년 7월 10일 첫 휴전회담 때 공산군 측에서는 남일 조선인민군 참모장과 이상조 등 3명의 북한 장성과 중공군 장성 2명이 참석했다. 왼쪽부터 중공의 셰팡과 덩화, 북한군의 남일, 이상조, 장평산

 

회담장에서는 ‘설전’, 전선에서는 ‘혈전’ 벌여

양측은 7월 26일 군사분계선 설정, 전쟁포로 교환, 휴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문제 등 5개 의제에 합의했다. 하지만 ‘군사분계선을 어디로 할 것이냐’를 두고 팽팽하게 대립, 이 문제를 타결하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주장한 반면, 유엔군은 “해·공군 전력의 우세를 반영해 현재의 접촉선보다 북쪽에 설정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우리 국민들도 전쟁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38선 정전’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회담이 지지부진할 때마다 유엔군 측은 중공과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군사적 공세를 취했다.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특히 중·동부 전선에서 적을 38선 북쪽으로 상당히 밀어 올렸다. 결국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현재의 휴전선과 유사한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어 양측은 협상의제 제3항 ‘휴전 실시와 보장’, 제4항 ‘포로 문제’, 제5항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를 병행 논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누가 보아도 실현이 불가능한 한국군의 단독 북진을 주장한 완고한 노 대통령의 고집 뒤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2년 넘게 지속된 협상 중에도 유엔군과 공산군은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다. 양측은 회담장에서는 ‘설전(舌戰)’을, 중·동부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을 벌였다. 양측의 이해관계와 계산법이 어긋나면서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회담도 결렬과 재개를 반복했다. 하지만 양측은 휴전협상 전체를 파국으로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협상을 하거나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공격으로 제한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치러진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으로는 펀치볼 전투(1951.7), 피의 능선 전투(1951.8~9), 단장의 능선 전투(1951.9~10), 백마고지 전투(1952.10), 저격능선 전투(1952.10~11) 등이 있다.

고지전이 한창일 때 38선 북쪽의 주요 전투 지역 (출처 국가기록원)

 

1951년 8월 무렵 시작된 고지전의 서막을 알린 강원 양구 일대의 피의 능선을 전투 뒤 촬영한 사진 (출처 백선엽)

 

이승만의 휴전 반대 복심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휴전협상 개시 때 유엔군의 접촉선은 임진강 하구~화천 저수지~속초를 연결하는 ‘캔자스선’이었다. 이 선은 38도선 북방 10~20㎞ 북방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특히 유엔군은 중부전선의 적 전투력 근원지인 철의 삼각지(철원~김화~평강)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 북방에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적을 압박했다. 그래서 휴전이 가까워지면서 이곳에서 전투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양측이 내놓은 모든 의제는 1952년 5월 7일까지 합의를 마쳤으나 포로교환 문제만은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 1952년 10월 8일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휴전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1953.1)하고 전쟁의 배후 주동자인 스탈린이 사망(1953.3)하면서 회담 재개 필요성이 양측 모두로부터 제기되어 양측은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승만의 휴전 반대 태도는 여전히 완강했으나 복심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이승만은 전쟁이 끝나면 동아시아 구석에서 잊힌 존재로 돌아갈 이 조그만 나라의 독립과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미상호방위조약’만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협상 카드는 “휴전을 거부하고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벼랑 끝 전술이었다.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 8일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되고 마지막으로 휴전조약 조인만이 남았을 때 이승만이 중대 결단을 내렸다.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휴전 반대 데모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6,930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7월 9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격분했으나 자칫 휴전협정 조인마저 무산될지 모른다는 우려감에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를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은 6월 25일부터 16일 동안 이승만을 14차례 만난 끝에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하는 등의 5개항에 합의하고 이승만으로부터 휴전조약 동의를 얻어냈다.

 

휴전협정은 765차례의 산고 끝에 이뤄진 결실

휴전조약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체결되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처음 시작된 이래 765차례의 산고 끝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정전협정문의 정식 명칭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협정에 관한 협정’이었다. 협정 조인은 유엔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쓰인 전문 5조 36항의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 9통에 각각 서명한 뒤 자신의 문서를 상대방에 전달하고 다시 상대방의 서명 밑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함으로써 이뤄졌다.

두 서명 당사자는 12분 만에 모든 서명 절차를 마치고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곧바로 퇴장했다. 마크 웨인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팽덕회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은 각각 후방의 사령부에서 협정문서에 서명했다. 휴전조약 조인은 인정했지만 휴전에는 반대한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정전협정문(영문본).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의 서명만 있고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서명은 없다. 정전협정 조인식 현장에는 유엔군 총사령관을 대신해 윌리엄 해리슨 미군 중장이, 북한·중국군을 대표해 남일 북한 대장이 참석, 세 사람 이름 아래에 서명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날에도 양측은 협정이 발효되는 밤 10시까지 상대방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공산군 측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는 모든 포탄을 쏘아댔고, 국군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이 이뤄진 데 대해 분노의 포격을 계속했다. 양측은 밤 10시부터 72시간 이내에 현 전선에서 후방으로 2㎞ 물러나는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3년 1개월 2일간을 끌며 250만 명의 남북한 한국인, 40만 명의 중공군, 3만 6,900여 명의 미군 등 모두 3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비극적인 전쟁이 ‘일시 중지’를 의미하는 ‘휴전’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전쟁은 한반도를 초토화했다. 개인의 재산은 물론이고 미미한 수준이던 국가 기간산업시설과 공공시설조차 대부분 파괴되었다. 320만 명의 피란민, 30만 명의 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 등으로 우리의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⑩ 빨치산 대토벌

 

빨치산 활동의 최절정기는 북한이 ‘9월 공세’를 감행한 1949년 9월

빨치산은 1946년의 ‘대구폭동’, 1948년의 ‘제주 4·3 사건’과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등의 진압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야산대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북한은 야산대를 조직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게릴라 전문양성기관인 ‘강동정치학원’에서 게릴라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뒤 남파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소위 ‘민주기지론’을 명분으로 남한에 10회에 걸쳐 2,400여 명의 대규모 유격대를 남파했다. 1948년 11월 180명의 인민유격대가 강원도 양양과 오대산 지구로 침투한 게 1차 남파였으나 대부분 소탕되었다. 이후에도 2차, 3차에 걸쳐 수백 명씩 오대산 지구로 침투했지만 역시 대부분 섬멸되었다.

제주도 4·3 사건을 주도한 김달삼이 1949년 8월 300여 명을 이끌고 경북 영양의 일월산으로 침투한 4차 남파 역시 실패했다. 1950년 3월의 10차이자 마지막 남파 때도 700여 명의 대규모 정예부대가 오대산으로 침투했다가 역시 대부분 토벌되었다. 결국 총 2,400여 명의 남파 게릴라들 중 2,000여 명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빨치산 활동의 최절정기는 북한이 ‘9월 공세’를 감행한 1949년 9월이었다. ‘9월 공세’ 때 목포형무소에서는 폭동이 발생해 죄수 225명이 사살되고 330여 명이 탈옥했다. 전남 광양에 주둔하던 1개 대대가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수백 명이 생포되는 광양사건이 벌어진 것도 9월 공세 때였다. 남한 전역이 내전에 돌입한 것처럼 ‘9월 공세’의 파괴력은 컸다. 당시 빨치산의 수는 대략 1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4월 군경에 체포되어 사형대에 오른 39명의 빨치산 (출처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정부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동계 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빨치산이 산세가 험하거나 외진 곳을 주요 근거지로 삼고 있어 토벌이 쉽지 않았다. 추위와 눈보라도 토벌을 방해하고 주민들도 빨치산 정보를 군경에 알려주지 않았다. 빨치산의 보복이 두렵고 경찰에 대한 반감·증오가 컸기 때문이다. 군경 토벌군은 마을을 불살라 유격대를 주민들과 분리시키는 ‘소진(燒盡)·소개(疎開)작전’으로 빨치산의 근거지를 뿌리째 뽑으려 했다. 이런 군경의 초토화 정책으로 일부 산간 마을의 주민이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군경, ‘소진(燒盡)·소개(疎開)작전’ 펼쳐

1950년 2월에 종료된 1949~1950년 겨울의 동계 토벌은 사살 365명, 생포 187명, 귀순자 4,964명의 전과를 올렸다. 군의 강경 진압으로 빨치산들은 차츰 소멸되었다. 1950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빨치산의 활동은 잠잠해졌다. 마치 곧 있을 6·25전쟁을 앞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김일성은 6·25전쟁 발발 이튿날인 1950년 6월 26일 평양방송을 통해 “남반부 빨치산들은 해방구를 확대 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소탕하라”고 촉구했다. 김일성의 지령은 이후에도 계속 방송되었으나 어느 곳에서도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서 20만 명 지하당원이 민중을 이끌고 호응할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도 결국에는 엉터리 상황 판단으로 확인되었다. 일부 지방에서 빨치산의 파괴활동이 있긴 했으나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남쪽에 있던 북한군의 퇴로가 막히자 패잔병들의 유격전이 전개되었다. 미처 퇴각하지 못해 빨치산이 된 패잔병들은 38선 이북 지역인 강원도 양구·평강·곡산·양덕 일대에 1만 명, 38선 이남지역인 오대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 일대에 1만 5,000여 명 정도 되었다. 빨치산은 강원도 철의 삼각지대인 철원·평강·김화에 제2 전선을 구축, 국군과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부대 시설과 물자를 파괴해 작전에 타격을 입혔다.

1951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붙잡힌 빨치산과 부역자들

 

특히 지리산을 근거지로 한 이현상의 남부군은 국군 전력 상당수를 호남·지리산 일대에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이현상은 1925년 박헌영 밑에서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해 구속된 것을 포함해 해방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12년 동안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단 한 번도 전향하거나 변절하지 않은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다가 1948년 지리산에 입산했다.

이현상이 남부군의 책임자가 된 것은 1950년 11월 강원도 평강군 후평리에서 열린 전국 빨치산 부대 회의에서였다. 당시 회의를 주재한 조선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이 남조선인민유격대 독립제4지대(남부군)를 편성해 회의에 참석한 이현상을 부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현상 부대는 회의를 끝내고 남하하면서 1950년 12월 충북 단양경찰서와 경북 문경경찰서를 습격했다. 1951년 2월 중순에는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평이라는 산마을에 도착, 2개월 남짓 머물면서 충북도청, 청주경찰서, 청주형무소 등을 기습공격했다. 빨치산이 도청소재지를 공격, 한때나마 점거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이현상과 남부군은 1951년 7월 지리산에 도착, 곧바로 6개 도당회의(전남북, 경남북, 충남북)를 열어 각 도당 유격사령부를 사단으로 승격하고 그가 직접 지휘하는 남부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이현상은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이현상

 

 

빨치산에게 남은 선택은 투항하거나 싸우다 죽는 것

빨치산을 완전히 토벌하라는 임무가 백선엽에게 주어진 것은 6·25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51년 10월이었다. 백선엽은 1951년 11월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부대로 자신의 성에서 딴 ‘백(白) 야전전투사령부(백야전사)’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과 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을 배속했다. 그동안 빨치산 토벌을 맡고 있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도 백야전사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백야전사는 3개 사단과 4개 전투경찰 연대를 휘하에 둔 막강한 전투부대가 되었다.

1951년 12월 2일 시작된 토벌 작전이 1952년 2월 8일 모두 종료되었을 때 남부군은 피살 7,000여 명에 포로 6,000여 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실낱같던 희망조차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절망으로 바뀌었다. 휴전협정에 빨치산의 지위에 관한 규정이 전혀 없어 빨치산이 북으로 돌아갈 길마저 막혀버렸다. 빨치산에게 남은 선택은 투항하거나 싸우다 죽는 것 둘 중의 하나였다.

토벌대 사령관인 백선엽 명의의 빨치산 투항 확인서

 

휴전 후에도 정부는 1953년 12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지리산, 회문산, 덕유산, 조계산, 백운산 등에 은신한 빨치산에 대해 대대적으로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1956년까지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전선 없는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빨치산으로서는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1956년 7월 13일 전북 남원에서 ‘공비 1명 사살, 2명 생포’를 끝으로 빨치산은 정부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현상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사살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당시 경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선 차일혁 총경은 또 다른 가설을 제기했다. 토벌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에 따른 여파로 1953년 8월 평당원으로 강등된 뒤 같은 빨치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있는 묘비(가묘)에는 이현상이 9월 17일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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