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6·25전쟁 10대 장면] ③ 워커 라인 설정과 다부동 전투 ④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미 해군 상륙지휘함 마운트 맥킨리 호 함상에서 인천상륙작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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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③ 워커 라인 설정과 다부동 전투

 

북한군, 낙동강 방어선 돌파와 부산 점령을 최종 목표로 삼아

6·25전쟁 발발 후 1개월 만에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우리 군 스스로 한강 인도교를 갑작스럽게 폭파해 상당량의 전투장비와 물자가 모두 한강 북쪽에 묶여 사실상 맨주먹 상태가 된데다 서부전선의 1사단, 춘천의 6사단, 동해안의 8사단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대의 지휘 체계가 사실상 와해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90%를 장악한 북한군이 마지막 남은 경상도 지역을 압박한 것은 1950년 7월 말이었다. 북한군은 4개의 공격축선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산을 점령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후퇴만을 거듭해온 국군과 유엔군이 남하하는 북한군을 상대로 낙동강 전선에 배수진을 친 것은 1950년 8월 초였다. 한미연합군을 지휘한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한국군과 미군이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해 8월 1일 전군에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그 뒤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른바 ‘워커 라인’이었다. 8월 3일에는 경북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 등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유엔군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폭파한 왜관철교를 감시하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왜관을 기점으로 동해안의 영덕까지 128㎞는 국군 5개 사단이, 왜관에서 낙동강 본류를 따라 진해만까지 이르는 112㎞의 남쪽 전선은 미군 4개 사단과 제1해병여단이 담당했다. 이에 따라 국군 5개 사단은 왜관에서 동쪽으로 1, 6, 8, 수도, 3사단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군만이 알고 있을 뿐 우리 국군에는 비밀에 부쳤던 또 다른 방어선이 검토되고 있었다.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슨 준장의 이름에서 딴 ‘데이비슨 라인’이 그것인데, 마산∼밀양∼울산을 잇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데이비슨 라인’은 방어선이라기보다 미군과 유엔군이 유사시 일본, 하와이, 괌 등으로 철수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죽음의 사수선이었다.

워커 라인과 데이비슨 라인

 

다부동에서 북한군을 상대한 핵심 병력은 백선엽 장군이 사단장인 국군 제1사단

당시 워커 장군이 가동할 수 있는 전력은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4개 사단을 합쳐 9개 사단이 전부였다. 이에비해 북한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인민군은 13개 사단이나 되었다. 따라서 워커 장군은 미 본토에서 증원군이 올 때까지 13 대 9라는 열세 속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개전 이래 약화하기만 하던 전투력이 국군과 유엔군의 연합작전으로 차츰 복원되기 시작하고, 미군이 국군 각 부대에 제공한 3.5인치 대전차 로켓(일명 바주카포)로 북한군의 T-34 전차를 무력화시켜 전차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공권까지 장악해 인민군의 후방 시설과 보급선에 일대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된 것도 연합군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북한군은 우리 정부와 미군 사령부가 있는 대구 점령을 일차 목표로 삼았다. 그러러면 대구로 가는 길목인 왜관 동북쪽 다부동을 점령해야 했다. 북한군은 김천에서 대구에 이르는 축선을 주공(主攻)으로 삼고 3, 13, 15사단을 다부동에 투입했다. 이 북한군을 상대할 핵심 병력은 국군 제1사단이었다. 방어 범위는 약 20㎞나 되었다. 사단장은 백선엽 장군이었고, 병력은 학도병을 포함해 7,600여 명에 불과했다. 북한군 병력은 2만1000명이 넘었다. 장비와 화력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 우리군 1사단 화력은 105㎜ 곡사포 12문을 비롯해 160문 정도였다. 이에 비해 북한군은 122㎜ 곡사포 20문을 비롯해 총 670문의 화력을 갖췄고, T-34 전차가 20여대 있었다. 병력은 1대 3, 화력은 1대 4 비율이었다.

백선엽 제1사단장이 콜린스 미 육참총장(가운데), 워커 8군사령관(맨왼쪽)과 함께 지형을 살펴보고 있다.

 

8월 4일 오전 7시 첫 포성이 울렸으나 그것은 서전이었고 본격적인 막은 10여일 뒤 열렸다. 북한군은 8월15일을 ‘대구 광복의 날’로 정하고 1사단 정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8월 13일 주 저항선인 왜관~다부동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국군 제1사단은 백병전으로 맞섰다. 고지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시체 썩는 냄새로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하룻밤 격전을 치르고 나면 총원의 30~40%가 손실되고, 다음날 또 신병으로 교체되었다. 누가 전사하고 후송되었는지 파악할 새가 없을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2차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 폭격

극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 저항선이 무너질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백선엽은 대구에 있던 미 8군사령부에 증원부대를 요청했다. 8월 16일 드디어 미군의 공중지원이 이뤄졌다. 일본에서 출격한 전략폭격기 B-29 98대가 그날 11시 58분부터 26분간 엄청난 양의 폭탄을 북한군 진영인 왜관 북서쪽 낙동강변에 폭탄을 집중적으로 투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의 융단폭격이었다.

북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도 끊임없이 도하를 시도했다. 북한군은 화공이 우세한 미군 방어지역을 피해 국군 제1사단 정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1사단이 위기에 놓인 가운데 8월 18일에는 대구 부근까지 침투한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 부근에 떨어져 대구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란령을 하달했다. 8월 20일 밤 북한군이 3개 사단 중 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이동시켜 스스로 공격력을 크게 약화시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엔군이 낙동강 건너편의 피란민 행렬을 주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한군은 8월 21일 밤 대규모 야간 공격을 감행, 죽음의 전투를 벌였다. 그날 밤 다부동 골짜기에는 발사음과 작열음이 진동했다. 6·25전쟁 최초로 전차전도 전개되었다. 이렇게 교전은 5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미 25사단 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공이 맞은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해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 해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라고 했다. 8월 21일은 다부동 전투의 고비이자 전환점이 된 날이었다. 피아간에 기습에는 기습, 돌격에는 돌격으로 맞서며 고지와 능선마다 시체가 쌓여 갔다. 북한군은 해만 지면 공격을 퍼부었고, 교전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적이 물러간 8월 22일 아침, 진지 앞에는 적 전차 9대, 자주포 4문을 비롯한 중장비와 차량 등이 버려져 있었고 미군 추산으로는 적의 전사자가 1,300명이나 되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의 T-34 전차

 

개전 이래 처음으로 전선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승전

미군의 지원과 국군 1사단의 죽음을 무릅쓴 방어전으로 8월 23일 마침내 팽팽하던 균형이 깨지고 전세가 아군 쪽으로 기울었다. 8월 24일 낙동강 전선을 다시 회복하면서 1차 다부동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만 인민군 5,690명이 사살되고 1,368명이 포로로 잡혔다. 국군도 2,234명이 전사하고 미군도 수백 명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을 만큼 치열했다. 전쟁 발발 후 끊임없이 밀리기만 하다가 대규모 방어전에서 처음으로 밀리지 않고 전선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승전이었다.

미군의 우세한 화공에 막혀 낙동강 전선에 대한 공격이 저지되자 북한군은 주공(主攻)을 동쪽으로 돌려 공세를 강화했다. 9월 2일 다시 시작된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1사단이 지켜낸 다부동 일대를 인수한 미 제1기병사단이 대패해 다부동을 빼앗기고 인접 국군 8사단도 영천을 상실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었다. 그러자 대구의 육군본부와 미 8군 등 주요 지휘부가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한때 ‘데이비슨 라인’이 심각하게 검토되었다. 하지만 영천을 두 번 빼앗기고 두 번 되찾는 공방전 끝에 9월 13일 우리 군이 마침내 영천을 점령함으로써 철수는 취소되었고 대역전극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절체절명의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날, 7만 5,000명의 유엔군도 인천상륙작전을 향해 부산항을 떠나고 있었다. 9월 18일 1사단의 주공 12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다부동 북쪽 12㎞ 지점까지 진출함으로써 북진을 위한 최초의 돌파구를 열었다. 다부동 전투 결과 북한군 2만4000명과 국군 1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6·25전쟁의 운명을 뒤바꾼 가장 중요한 전투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오른쪽)이 워커 미8군사령관을 격려하고 있다.(1950년 11월 24일)

 

 

④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미 본토 군 수뇌부의 인천상륙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인천으로 확정

적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공급선을 끊은 뒤 2개의 전선을 만들어 적의 병력을 분산·격파하는 것, 그것이 낙동강 전선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1950년 7월 초에 구상한 인천상륙작전의 목표였다. 미 본토의 군 수뇌부도 적 후방에 상륙하겠다는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명명된 인천 상륙을 반대했다. 그들은 인천보다 지형 조건이 좋고 낙동강 전선과 가까워 적군을 바로 등 뒤에서 칠 수 있는 전북의 군산을 선호했다.

실제로 인천은 상륙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일본과 부산으로부터 이동거리가 지나치게 길고 조수, 수로, 암초 등의 해안 조건도 대규모 부대가 상륙하는 데 부적합했다. 상륙용 주정을 해안에 접근시키려면 물 깊이가 최소한 7.6m는 되어야 하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만조일자는 1개월 중 하루 이틀밖에 안 되었다. 상륙할 수 있는 만조 시간도 2~3시간에 불과해 다음 상륙을 하려면 10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항구로 접근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비어수로(飛魚水路)는 협소하고 굴곡이 심해 함대의 기동을 막았을 뿐 아니라 자칫 적의 공습이나 포격으로 함선이 침몰하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면 바닷길은 그대로 폐쇄될 판이었다. 물론 군산도 문제는 있었다. 적의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한다는 상륙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고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부산에서 후퇴하는 인민군과 빨리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여러 가지 상황을 숙고한 끝에 적을 강력히, 그리고 깊숙이 치려면 인천이 적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미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참모총장 등이 맥아더의 뜻을 꺾기 위해 1950년 8월 23일 미국에서 도쿄로 날아와 맥아더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맥아더가 “인천상륙이 5000분의 1 확률을 가진 도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아군뿐만 아니라 적도 인천을 공격하리라고 예상하지 않기 때문에 전략적 기습이 가능하다”며 고집을 꺾지 않아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했다.

인천상륙작전과 이후의 전개과정 (출처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D-데이는 9월 15일 오전 6시 30분

작전은 구체화되어 9월 3일 일선 부대에 하달되었다. 골자는 이랬다. “해병사단 항공기, 미 공군기, 영국 공군기가 항공모함에서 최대의 항공지원을 제공한다. 상륙장소로부터 48㎞ 이내를 목표 지역으로 한다. 상륙해안은 월미도 북단, 인천북단 해안벽 지역, 인천남단 갯벌지역 등 3곳을 선정하고 이를 순서대로 녹색해안, 적색해안, 청색해안으로 명명한다. 상륙시간은 9월 15일 아침 만조시간 오전 6시 30분을 L시, 오후 만조시간 오후 5시30분을 H시로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는데도 어떻게 새나갔는지 정보가 일본 언론에 공개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소련의 스파이들이 많아 김일성은 어떤 형태로든 인천상륙작전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인천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았다. 이유를 놓고 설들이 분분하지만 “맥아더가 판단을 흐리게 할 목적으로 자연조건이 나쁜 인천상륙작전의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고 생각해 김일성이 방어를 소홀히 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계획대로 D-데이는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정확한 만조시간은 오전 6시 59분과 오후 5시 59분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 밀물 때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이 상륙하고 곧바로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11시간 뒤 밀물 때에 있을 두 번째 상륙도 성공할 수 있다. 다행히 유엔군의 정보 판단에 의하면 8월 말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거의 모든 전투역량을 낙동강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고, 서울을 비롯한 후방지역에는 지역경비부대와 병참선 경비부대 그리고 신편부대가 산재해 있었다. 인천지역의 병력 규모는 2000여 명, 서울지역의 적 병력은 5500여 명이었다. 그후 증원된 2500여 명을 합하면 서울·인천지역에서 활동 중인 북한군의 총 병력은 1만여 명으로 판단되었다.

한국 해병대가 목표지점으로 상륙하고 있다.

 

상륙에 앞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양동작전 전개

상륙작전에는 미 함정 194척을 비롯해 한국 15척, 영국 12척 등 7개국 함대 총 261척이 동원되었다. 항공모함 4척, 호위항공모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33척 등이 함대를 구성해 위용을 자랑했다. 맥아더는 상륙부대로 미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제10군단을 편성하고 극동군 참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을 군단장으로 임명했다. 한국의 신현준 대령이 이끄는 제1해병대와 백인엽 대령의 육군 제17연대는 각각 미 해병1사단과 보병 7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한국군 7,000여 명을 포함해 7만 5,000명이나 되었다.

미 해병 1사단과 미 보병 7사단은 각각 일본의 고베와 요코하마에서 9월 11일 출항해 부산에서 출항한 국군 제1해병연대와 국군 17연대 등과 합류했다. 합동상륙기동부대의 사령관인 스트러블 중장이 승선한 기함 로체스터호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승선한 마운트 맥킨리호는 9월 12일 일본 사세보항에서 출항했다.

유엔군은 상륙에 앞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양동작전을 전개했다. 부산과 일본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의 방향이 적에 발각되지 않도록 동해안의 삼척 일대에 맹렬하게 포격하는가 하면 우리 해병대는 군산에 상륙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경북 영덕 남쪽 장사동에서는 독립유격 1대대의 학도병이 9월 15일 새벽 해안에 실제 상륙했으나 태풍의 영향으로 상륙함(LST) ‘문산호’가 좌초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다.

경북 영덕군 장사리 앞바다에 좌초한 문산호

 

팔미도 등대불은 작전의 성공을 담보한 생명수

유엔군은 상륙 며칠 전부터 대대적으로 인천 주변을 공습했다. 네이팜탄으로 상륙 예상지역인 월미도를 초토화하고 인천과 서울을 폭격했다. 순양함과 구축함에서도 대규모 함포사격을 가했다. 이렇게 폭격과 포격으로 적을 무력화한 유엔군이 마침내 협소하고 굴곡이 심한 비어수로 해협으로 진입한 것은 9월 14일 밤이었다.

함대는 9월 15일 새벽 0시 50분에 불을 밝힌 팔미도 등대의 도움을 받아 비어수로 해협을 통과해 인천항 부근까지 다가갔다. 당시 비어수로에 설치된 세 군데 항해등 모두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팔미도 등대불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담보하는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꺼져 있는 등대불을 밝힌 주역은 유진 클라크 미 해군 대위, F. 클락혼 미 육군 소령, 존 포스터 미 육군 중위, 켈로(KLO) 부대 소속 연정 대위, 계인주 대령, 최규봉 고트대(隊) 대장 등 6명이었다.

오전 5시 8분 맥아더가 타고 있는 기함 마운트 매킨리호가 닻을 내리고 5시 40분 월미도를 향해 함포가 포문을 열면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의 막이 올랐다. 오전 6시 33분 선발공격대인 미 해병대 1파가 월미도에 상륙하고 이어 제2파가 상륙전차와 함께 상륙하면서 상륙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유엔군은 산발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비교적 쉽게 월미도를 점령했으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력부대의 2차 상륙이 시작되려면 오후 5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동안 적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대원들이 인천 응봉산 앞 해안에 상륙하기 위해 사다리로 제방을 올라가고 있다. 현재 응봉산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있다.

 

“5000분의 1 확률을 가진 도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후 5시 30분경부터 각각 남북 해안에 상륙한 유엔군이 마침내 교두보를 확보한 것은 그날 자정을 넘긴 이튿날 새벽 1시 30분쯤이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서울의 서쪽에서 시가지를 향해 전진했다. 9월 18일 인천을 점령한 미 제7보병사단은 서울의 남쪽에서 북한군 증원을 차단하는 동시에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상하는 미 8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9월 18일 미 제5해병연대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고 국군 해병대와 합세해 행주나루터로 향했다. 미 제1해병연대는 경기도 소사를 거쳐 이튿날 영등포 근처까지 진격했다. 9월 20일에는 주력부대까지 한강 도하에 성공, 서울 공방전을 전개했다. 북한군은 최용건을 방위사령관으로 내세워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뒤였다. 유엔군은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 북한군 방어벽을 무너뜨리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다.

서울시민들이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환영하고 있다.

 

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서울을 수복하기까지 미 제1해병사단은 북한군 4.6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1만 3,700여 명을 살상했으며 전차 44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제1해병사단의 피해는 전사자 415명, 부상자 2,000여 명이었다. 제7보병사단은 북한군 4,000여 명을 사살하고 1,3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피해는 전사자 106명, 실종자 57명, 부상자 409명이었다.

미 제10군단은 1950년 10월에 시작된 원산상륙작전에도 투입되었다. 그 후 장진호 전투를 치르고 흥남항을 통해 북한에서 철수했다. 1950년 12월에는 미 제8군에 배속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부전선에서 작전을 펼치다가 1954년 한국을 떠나 1955년 4월 미국에서 해체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다면 유엔군이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작전을 시도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쟁의 장기화로 더 많은 인명 손실은 물론 한반도 전체가 황폐화되고 초토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 클릭! ① 6·25전쟁 발발  ② 유엔군 참전
☞ 클릭! ③ 워커 라인 설정과 다부동 전투 ④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
☞ 클릭! ⑤ 국군·유엔군의 38선 돌파와 중공군 참전 ⑥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 클릭! ⑦ 중공군·북한군의 총공세와 1·4 후퇴 ⑧ 포로교환협정 체결과 반공포로 석방
☞ 클릭! ⑨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⑩ 빨치산 대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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