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지지
최근 파키스탄에 기지를 둔 테러집단이 카슈미르 지역에서 자행한 폭탄 테러로 인도 경찰 41명이 숨졌다. 이 때문에 오랜 적대 관계에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군사 충돌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인도 정부는 즉각 군사 공격 가능성을 내비쳤다. 카슈미르를 둘러싼 두 나라의 분쟁은 한일 간의 ‘독도 분쟁’처럼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은 어떻게 싹튼 것일까.
카슈미르 지역의 70%가 무슬림인데도 인도령으로 무력 편입한 게 분쟁의 씨앗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분쟁은 두 나라가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한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독립에는 성공했으나 한반도 면적 크기의 카슈미르 지역을 누가 차지하는가를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카슈미르 지역 주민 200만 명의 70%는 무슬림이었다. 당연히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으로 편입되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그 지역의 토후왕을 포함한 지배층과 30%가량의 힌두교도들은 인도 편입을 원했다. 여기에 비종파 정당인 카슈미르 국민연맹의 지도자이자 무슬림인 셰이크 압둘라까지 카슈미르의 인도 병합을 호소하면서 카슈미르는 인도령으로 병합될 처지에 놓였다. 파키스탄은 그런 우려가 현실화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해서 1947년 10월 22일 파키스탄 북서부의 파탄족 무장세력을 주축으로 한 파키스탄 병력으로 하여금 카슈미르의 주도 스리나가를 침공케 했다.
카슈미르의 토후왕은 이를 전면적 공격으로 받아들여 10월 24일 카슈미르의 인도 병합을 선언하며 인도에 파병을 요청했다. 인도의 네루 총리는 10월 28일 군대를 카슈미르로 파병해 파키스탄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이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다.
유엔 안보리가 1948년 8월 “양측은 즉각 휴전하고, 군대를 철수시키며, 카슈미르의 정치적 장래를 카슈미르인 스스로의 결정에 맡긴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인도는 찬성했으나 파키스탄은 반대했다. 그래도 유엔의 계속된 노력으로 1949년 1월 1일, 양국은 휴전에 합의하고 7월 27일 ‘카라치 협정’에 따라 휴전선을 획정해 경계선으로 삼았다. 인도령(63%)과 파키스탄령(37%)의 영토로 분리한 통제선을 경계로, 북서부의 파키스탄령은 ‘아자드 카슈미르’, 남동부의 인도령은 ‘잠무 카슈미르’로 나뉘었다.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합의에 불과했다. 카슈미르의 귀속이나 법적 지위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를 완결짓지 않고 유보시켰으나 인도는 자국령 카슈미르를 인도연방의 1개 주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파키스탄에서 반인도 정서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여기에 카슈미르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인도는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소련에 접근하고 파키스탄은 자연스레 미국과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1962년 중국이 카슈미르 동부지역을 침공하더니 일부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결국 카슈미르는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 3곳으로 갈라졌다.
중국이 인도에 승리하자 전쟁을 통해 카슈미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파키스탄 내에서 고조되었다. 1965년 4월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의 파키스탄 국경에 위치한 랜이라는 불모지대에서 양국이 충돌한 것은 이런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이 지역은 사실상 쓸모없는 반사막지대여서 국경조차 제대로 획정되지 않았으나 석유가 많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소규모 충돌이 잦다가 결국 대규모 전투로 비화했다. 이런 와중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원하는 ‘잠무 카슈미르 해방전선’ 등의 무슬림 게릴라들이 8월 5일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에서 무장봉기하면서 1965년 9월 6일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발전했다.
9월 23일 유엔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고 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10일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양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양측의 경계선이 1949년 획정된 그대로 확정되면서 카슈미르 문제 해결은 미봉에 그쳤다.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1969년 3월 물러났다.
인도, “파키스탄 문제는 인도 문제”라며 동파키스탄 독립운동에 개입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한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71년이었다. 도화선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위치한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의 독립 선언이었다. 그에 앞서 파키스탄은 1969년 취임한 야히아 칸 대통령의 주도로 헌법을 개정하고 1970년 12월 독립 23년 만에 인구비례에 의한 첫 총선을 실시했다.
문제는 동서 파키스탄 양측이 종교만 같을 뿐 언어와 문화, 인종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땅 면적은 서파키스탄이 넓었으나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많았다. 그런데도 언어는 동파키스탄의 벵골어가 아닌 서파키스탄의 우르두어가 공식 언어로 강제되고 수도 역시 서파키스탄에 있었다. 군대와 공무원도 서파키스탄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총선에서 유리한 쪽은 인구가 많은 동파키스탄이었다. 총 313명의 의원을 선출한 선거 결과, 동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당수가 이끄는 아와미연맹이 동파키스탄에 할당된 169석 가운데 167석을 차지함으로써 다수당이 되었다. 당초 재집권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서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부토의 파키스탄 인민당은 83석에 그쳤다.
선거 승리로 아와미연맹의 라만이 총리 후보 제1순위에 올랐으나 야히야 칸 대통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71년 3월 1일 내각을 해산하고 의회 개원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동파키스탄 주민들이 이에 온몸으로 항거하고 라만 당수가 3월 26일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포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아와미연맹을 불법화하고 라만 당수를 체포해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했다. 그러자 동파키스탄에서 국민 총궐기를 촉구하는 ‘해방군대’가 결성되어 파키스탄 정부군을 상대로 무력항전이 전개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동파키스탄의 피난민이 혼란을 피해 하루에도 수만 명씩 국경을 넘어 인도로 피난했다. 난민 수가 1000만 명에 달하자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가 “파키스탄 문제는 인도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개입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과거 두 차례나 전쟁을 치렀던 파키스탄을 동서로 분리함으로써 협공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이런 인도의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동파키스탄의 아와미연맹 지도부는 1971년 4월 17일 인도와 가까운 동파키스탄의 한 소도시에서 라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방글라데시(벵골 국가) 인민공화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사태가 긴박해지자 야히아 칸 파키스탄 대통령은 11월 23일 파키스탄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3일 “인도가 동파키스탄의 국경을 침공했다”며 인도의 서북부 군사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도는 기다렸다는 듯 12월 4일 동파키스탄으로 쳐들어갔다.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래 6년 만에 또다시 제3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소규모 분쟁 빈발하지만 전면전은 피해가는 중
1971년 12월 16일 인도가 동파키스탄의 수도 다카를 함락하고 파키스탄 정부군이 항복함으로써 방글라데시는 비로소 독립에 성공했다. 풀려난 라만은 1972년 1월 12일, 초대 총리에 취임하고 동파키스탄은 1972년 7월 2일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심라협정’에 따라 비로소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카슈미르 문제와 관련해서는 1947년에 정해진 1300여㎞의 휴전선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3차례의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의 교전 행위는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른 사상자 역시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현재 두 나라는 여전히 동상이몽을 꾸고 있다.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영유권 분쟁을 국제문제로 확대해 현상 타파하기를, 인도는 카슈미르 영유권 문제가 현상 유지되기를 각각 바라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은 1989년 이후부터 게릴라전으로 바뀌었다. 인도령인 잠무 카슈미르에서는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분리주의 무장단체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인도 정부는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는 일종의 ‘미니 전쟁’을 벌여왔다. 분리주의 무장단체들과 인도군의 전투로 지금까지 주민 등 7만여 명이 사망했다. 현지 인권단체가 주장하는 사망·실종자 규모는 그 2배를 훌쩍 넘어선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는 지금도 소규모 분쟁이 빈발하고 있지만 두 나라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전면전은 피하고 있다.
오늘날 카슈미르는 인도, 파키스탄, 중국 등 3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땅의 90%는 산악지대로 해발고도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6개나 있다. 한국 산악인이 많이 찾는 K2봉은 카슈미르 북쪽에 위치한다. 인구는 인도령 900만 명, 파키스탄령 300만 명이고 면적은 인도령 10만 1000㎢, 파키스탄령 7만 8000㎢, 중국 점령지역 4만㎢로 나뉘어 있다. 인구 대부분이 무슬림(70%)이고 힌두교 신자는 소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