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국 정치 대표하는 세 총리 이야기] ② 클레멘트 애틀리… 내치는 복지·국유화·계획경제 우선했으나 외교는 반소·친미 정책으로 국익 우선한 실사구시형 노동당(좌파 정당) 총리
2022년 5월 22일 · zznz
↑ 클레멘트 애틀리
by 김지지
■ ‘현대 영국 총리 중 역대 최고’로 꼽힐 때 많아
2022년 현재 영국 총리는 보리스 존슨이다. 총리 순서 상으로는 1721년 로버트 월풀 총리 이래 77번째이고 거쳐간 총리는 60여명에 이른다. 이 중 영국의 언론이나 기관·단체가 ‘현대 총리 중 역대 최고’를 묻는 여론조사를 하면 으레 꼽히는 총리가 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마가렛 대처 등이다. 이중 애틀리는 국내에선 낯선 이름이지만 대중이 아니라 전문가를 상대로 조사할 때는 자주 1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파시즘이 기승을 부린 1930년대부터 냉전이 본격화한 1950년대까지 20년간 영국 노동당을 이끌었고 2차대전 때는 경쟁당인 보수당의 처칠의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를 지냈으며 2차대전 종전 직후에는 6년 간(1945.7~1951.10) 총리를 지낸 영국에선 유명 정치가다.
■개인 삶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는 런던의 중산층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1901~1904)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1906년 변호사가 되었다. 그때까지 삶은 미래가 보장된 엘리트였고, 기존 질서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제국주의자이면서 보수주의자였다. 이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1906년 노동자 계층 아동들을 위한 자선 클럽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목격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었다. 그는 민간 자선만으로는 빈곤을 완화할 수 없고 국가의 개입과 소득 재분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곧 사회주의자로 전향하고 1908년 좌파 정당인 노동당에 가입했다. 1909년 노동당 소속으로 처음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애틀리는 1914년 발발한 1차대전에 장교로 참전했다.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의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작전과 이를 추인한 영국 정부의 안이한 판단으로 25만명의 사상자를 낸,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벌인 갈리폴리 전투(1915.4~1916.1)에도 참전했다. 처칠은 전투 패배에 따른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에서 물러났으나 애틀리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처칠을 뛰어난 군사전략가로 평가했다.
애틀리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종전 후였다. 1919년 런던에서 가장 궁핍한 지역 중 한 곳인 스테프니 지역에서 시장에 당선되었고 1922년 같은 지역에서 노동당 소속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노동당 내각에서 육군차관과 체신장관 등을 역임하고 노동당 부당수(1932~1935년)를 거쳐 1935년 10월 마침내 당수 자리에 올랐다. 노동당 당수 초기에는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영국의 재무장을 반대했지만 네빌 체임벌린 총리(재임기간 1937.5~1940.5)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대해 유화정책을 취하자 체임벌린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1939년 9월 2차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5월 네임벌린 후임으로 총리에 취임한 처칠이 전시 연립내각을 구성했을 때는 부총리로 참여해 누란에 처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처칠이 주로 전쟁과 외교 분야에 전념하는 동안 애틀리는 국내 문제를 맡아 사회 문제에 대한 방향을 정하고 실무 경험을 쌓았다. 애틀리는 경황이 없는 전쟁 중에도 자신의 정치 노선인 복지 확대를 요구한 끝에지친 국민을 달랠 필요가 있었던 처칠의 동의를 끌어냈다.
■ 총선 승리와 총리 취임 (1945년)
독일 항복 직후인 1945년 7월 5일 영국은 전시 연립 내각을 깨고 총선을 실시했다. 총선 전, 총리는 2차대전 때 히틀러의 공세로 풍전등화 같았던 영국을 위기에서 구한 전쟁 영웅 처칠이었으니 누가 보아도 처칠과 보수당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보수당의 2배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해 압승을 거뒀다. 선거 결과는 노동당 47.7%, 보수당 36.2%로 노동당의 압승이었다. 보수당은 전체 의석의 반도 안되는 197석을, 노동당은 무려 393석을 차지했다.
노동당의 승리는 전쟁에 지친 영국인들이 과거의 영광이나 되새길 것 같은 보수당 대신 ‘미래를 맞이하자(Let us face the future)’라는 구호 아래 전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노동당을 국민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 국민에게 절박했던 건 전후 복구와 민생 안정이었고, 그런 문제 해결은 노동당이 더 나아보였다. 처칠이 불같은 성격에 열정적인 태도와 명연설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끌고 가는 ‘전시 지도자’ 스타일이었다면 애틀리는 조용한 성격과 침착한 태도 그리고 절제된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하며 밀고 가는 평화시의 리더 스타일이었다. 애틀리는 역사적 압승을 거둔 후 총선 소감을 묻는 질문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짧게 말했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참고로 노동당은 1900년 2월 27일 노동조합 대표 등 129명이 모여 창당되었다. 이들은 노동조합과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보적 노선의 페이비언 협회,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연맹 등 사회주의 단체들의 대표들이었다. 처음부터 노동당의 이름을 내건 것은 아니었다. 의회 진출을 목표로 처음 출범한 이름은 노동대표위원회(LRC)였다. 노동당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출범 6년 후의 일이고 사회주의 당헌을 채택한 것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최초로 집권에 성공했다. 온갖 역경을 딛고 최초의 노동당 내각의 총리는 사생아 출신이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제임스 램지 맥도널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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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리 업적 (1945~1951년)
애틀리는 취임하자마자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쌓은 정치 철학을 거침없이 정책으로 토해냈다. 그것은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국 사회를 지탱했던 두 축인 자유주의와 제국주의를 뒤집는 것이었다. 애틀리는 각료를 발탁할 때 학벌보다 실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다. 재임 기간 37명의 각료 중 대학 졸업자는 10명에 불과했다. 노동자나 노동운동가 출신은 19명이나 되었다.
백미는 노동운동가 어네스트 베빈을 외무장관으로 발탁한 것이다. 베빈은 운수노조 위원장(1922~1940)과 전시 연립내각에서 노동장관(1940~1945)을 역임했으나 누가보아도 외무장관 자리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오랜 노동운동으로 다져진 협상 능력과 상대의 의중을 잘 꿰뚫는 안목으로 애틀리와 임기를 같이하며 전후와 냉전 초기 영국 외교의 확실한 방향타 역할을 했다. 애틀리는 취임 후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복지국가, 계획경제를 국정 3대 지표로 삼아 바로 실행에 옮겼다. 특히 신경을 쓴 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구호로 요약되는 복지국가 실현이었다.
대표적인 정책은 영국이 지금도 자랑하는, 세금을 재원으로 전 국민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국민건강시스템(NHS)이었다. 의료 개혁을 추진할 보건부장관 자리는 노동당 내에서도 추진력이 있고 강경파인 40세의 어나이린 베번을 기용했다. 베번은 국민 건강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각오로 관련 법을 제정해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전국 3000여개의 병원 중 상당수의 병원이 국유화되고, 의사·간호사·약사 등 의료진은 보건부에 소속되었다. 하지만 NHS는 의사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쳐 2년간 실행되지 못하다가 1948년 7월에서야 시행되었다.
영국 사회를 지탱했던 두 축인 자유주의와 제국주의 뒤집어
애틀리 내각은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에도 팔을 걷어부쳤다. 잉글랜드 은행을 1946년 말 국유화하고, 낮은 생산성에도 툭하면 노사쟁의를 벌이는 석탄산업을 국유화했다. 항공·철도·화물차·운하·유무선통신·전기·가스 등 주요 기간산업도 차례로 국유화했다. 그 결과 전체 산업의 20% 정도가 국유화되었다.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처칠이 화장실에서 애틀리 곁에서는 볼 일을 보려 하지 않은 것을 본 누군가 이유를 물으니 “애틀리는 덩치 큰 것만 보면 국유화 하려고 하니 혹시 내 걸 보고 나면….”이라고 처칠이 농담했다는 일화다.
애틀리 내각은 의료·연금·실업 수당 등 복지 정책도 제도화하고 임기 말까지 100만채를 새로 짓고 50만채를 보수하는 주택보급 사업도 펼쳤다. 그것은 국민에게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애틀리 정부의 모습이었다. 이런 애틀리에게 ‘영국 전후 질서의 설계자’ ‘영국을 복지국가로 전환시킨 주역’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애틀리는 대외적으로는 인도를 독립시키는 식으로 제국주의를 정리하는 수순을 밟았다. 인도가 1947년 이후 인도·파키스탄·실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 나뉘어 독립한 후 모두 영연방에 가입했으니 식민지를 독립시키되 가까운 친구로 남게 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다만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로 나눠서 독립시키는 문제는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해 오점을 남겼다.
■ 반소(反蘇) 친미(親美)
애틀리는 성격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처칠과 달라 여러 분야에서 충돌했다. 그러나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앞세울 때는 차이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죽이 잘 맞는 정책은 국익 중심의 반소·친미였다. 2차대전 중 경쟁자인 처칠이 주도하는 전시 연립내각에 참여해 부총리를 맡은 것도 국익 중심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외교에서도 국익을 위해 반공·반소 정책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소련은 물론 영국 공산당과도 멀리했다. 노동당원이 공산당과 가까이 하면 가차 없이 제명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전후 냉전기가 본격화할 때였다. 애틀리는 소련이 동유럽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좌파정당인데도 미국을 편들며 자유진영의 핵심 역할을 했다. 1947년 이후 노동당 내 좌파 세력이 ‘계속 좌향좌(Keep Left)’를 주장하며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3세력으로서 중립정책을 요구했지만 애틀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19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 집단방위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창설될 때도 앞장섰다. 영국이 독자 노선을 걸으려면 핵무기 보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1947년 1월 자체 핵무기 개발을 지시한 것도 애틀리였다. 그의 핵 자주권 확보 노력은 정권이 처칠로 넘어간 1952년 남호주에서의 핵실험으로 결실을 맺었다.
■애틀리와 한국
애틀리의 리더십은 한국의 운명에도 두 차례나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1945년 7~8월 포츠담 회담이다. 처칠은 1945년 7월 5일 실시된 총선 후 총선 결과가 최종 발표되지 않은 상태에서 트루먼 미 대통령과 스탈린 소련 서기장과 함께 2차대전 처리를 논의하는 독일 포츠담 회담에 7월 17일 참석했다. 그런데 7월 26일 총선 결과가 노동당의 압승으로 발표되고 곧이어 애틀리가 총리로 취임해 포츠담으로 오자 바로 바톤을 애틀리에 넘겨주고 귀국했다. 한국 문제는 포츠담 협정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둘째는 한국전쟁 참전이다. 노동당 정권은 이념적으론 좌파지만 소련 공산 제국주의의 침략과 팽창 야욕 앞에선 단호했기 때문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한국전에 파병했다. 영국군은 1000여명이 전사하고 2600여명이 다쳤다. 실종자도 170여명, 포로도 970여명이나 되었다. 애틀리는 미 트루먼 정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을 상대로 원자폭탄 사용을 검토하자 미국으로 날아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사용을 만류했다. 애틀리는 한국도 중요하지만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해 전쟁 억지력 강화를 위해 핵무기를 남겨두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게다가 핵무기 사용은 그 무렵 소련도 이미 핵실험에 성공(1949년 8월)한 터여서 자칫 3차대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꼭 애틀리의 만류 때문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론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선 2015년 8월 공개된 미국의 외교문서에 이유가 담겨있다. 외교문서에,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승인 직후 후회했다는 서한이 들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트루먼의 심적변화에 따라 스스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흥미로운 것은 1950년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영국 정보기관 MI6와 외교부에서 근무하던 필비·매클레인 등 영국 출신의 소련 스파이들이 미국의 CIA, 국무부 등과 접촉하면서 얻게 된 6·25전쟁 관련 고급 정보를 소련에 넘긴 보고 중에 애틀리가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맥아더 장군에게 원폭 사용권한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훗날 트루먼이 은퇴한 뒤 살고 있던 자신의 집을 찾아온 김종필에게 “통일을 못시켜드린 점으로 해서 한국사람들에게는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영국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다. 애틀리에게 책임을 떠넘긴 말인데 진의는 알 수 없다.
■ 총선 패배와 총리 퇴임 (1951년)
애틀리가 시동을 건 복지정책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애틀리는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 집중했을 뿐, 파이를 키우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영국병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결국 거대 국영기업은 점점 부실해져 영국 경제의 암덩어리가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국방비가 증가하고, 핵무기 개발로 재정도 악화되었다. 그러자 보수당이 ‘국민을 풀어주라(Set the people free)’라는 구호로 노동당의 계획경제와 국유화 정책을 비난했다. 결국 애틀리는 1951년 10월 총선에서 20만표라는 박빙의 표차로 패배해 정권을 보수당에 넘겨주고 자신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애틀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노동당 당수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노동당의 지지도는 시간이 갈수록 하락했다. 결국 처칠의 후계자인 앤서니 이든과 총리직을 놓고 겨룬 1955년 5월 총선에서는 4년 전보다 더 격차가 벌어졌다. 보수당은 345석(49.7%), 노동당은 46.4%(277석)였다. 패배 이후 애틀리는 노동당 당수직에서 물러나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다. 골초였던 탓에 얻은 폐 질환으로 1967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애틀리의 유해는 화장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 대처의 등장… 애틀리의 국유화 정책 뒤집어
애틀리 이후에도 노동당 정부 시대(1964~1970년, 1975~1979년)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국유화는 생산성 문제로 정부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게 되어 결국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1979년 5월~1990년 11월) 대대적인 민영화를 불렀다. 대처는 애틀리가 국영화시켰던 철도, 항공, 통신, 광산 등을 민영화시키고 국가 소유의 임대 주택을 임대인이 살 수 있도록 해 자유시장으로 내보냈다. 단, 의료 영역은 사회적 동의가 워낙 강해서 건드리지 못했고 사회보장제도 부문 역시 큰 틀은 유지했다. 1997년 보수당은 노동당에 다시 정권을 넘겨주지만, 이후 대처와 애틀리는 위대한 지도자를 묻는 학계 설문에서 자주 1위를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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