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 모습
1960년의 ‘안보투쟁’ 패배 후 일본 학생운동은 분열을 거듭하며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1968년 도쿄대와 니혼대에서 일련의 학내문제가 불거지면서 학생운동은 침체에서 벗어날 계기를 맞았다. 당파를 초월한 ‘전공투(全共鬪・전학공투회의)’에 일반 학생들까지 가세하면서 학생운동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그들이 친 바리케이드는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방구였고 기성사회와 선을 그은 단절의 벽이었다.
1968년 한 해 동안 전공투를 중심으로 전국 116개 대학에서 교내 분쟁이 일어나 15개 대학이 이들에게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1968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공투에 점거된 도쿄대 야스다(安田) 강당 공방전은 ‘전공투’ 운동의 상징이었다. 1968년 1월 29일 인턴제 폐지에 불만을 품은 의학부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고 이 와중에 학교 측 간부가 연금된 것이 발단이었다. 대학 측이 17명의 학생을 제명하고 더구나 사건 현장에 없던 학생들까지 제명자 명단에 포함시키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의학부 학생들은 제명 철회를 요구하며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다. 경찰이 물리력으로 학생들을 강당에서 쫓아냈으나 7월에는 일반학생들까지 가세해 강당을 재점거하고 ‘도쿄대 전공투’를 결성했다.
‘자기 부정’과 ‘도쿄제국대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며 장기전에 돌입하자 1969년 1월 18일, 수 천 명의 경찰이 강당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철거하려하자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강당이 불에 타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도쿄대생들의 극렬 저항에 냉소와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경찰은 헬리콥터까지 동원, 최루탄을 쏘고 물을 뿌려대며 강당 탈환을 시도했다. 진압작전은 이튿날 오전까지 이어졌다. 1월 19일 오후 5시45분 마침내 최후의 1명이 검거됨으로써 1년을 끌어온 ‘도쿄대 분쟁’도 끝이 났다. 631명이 검거된 도쿄대 분쟁으로 도쿄대는 1969년도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했다. 전국 대학 분쟁의 절정을 이룬 이 공방전 이후 학생운동은 더욱 과격한 양상으로 치달았고 무장투쟁노선을 추구하는 ‘적군파’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