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격을 따돌리고 열흘간 신출귀몰하며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이가 있었다. 김상옥 의사였다. 상하이에서 의열단으로 활동하던 김상옥이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로 잠입한 것은 1922년 12월이었다. 몸에는 권총 4정과 수백발의 실탄, 그리고 폭탄을 지니고 있었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 김상옥이 조선인 탄압으로 악명을 떨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일본 경찰과 매일신문 기자 등 7명이 죽거나 다쳤고 건물 일부도 파괴됐다.
일경이 부랴부랴 범인 검거에 나섰으나 김상옥은 현장을 빠져나와 후암동 매형집에 은신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폭탄 투척 5일 만인 1월 17일 새벽, 일경이 은신처를 급습했다. 김상옥은 쌍권총으로 대항하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담장을 넘어 남산에 몸을 숨겼다. 이 과정에서 일경 1명이 죽고 수명이 다쳤다.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으로 내려온 김상옥은 눈길을 뚫고 왕십리의 한 절로 피신했다. 일경의 추격이 그곳에까지 미치자 이튿날 저녁 승복을 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이때 김상옥은 짚신을 거꾸로 신어 발자국이 반대방향으로 찍히도록 해 마치 산으로 올라간 것처럼 꾸며 일경의 추격을 교란시켰다. 1월 19일 김상옥이 종로구 홍제동 동지 집에 숨어 동상을 치료하고 있을 때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된 일경들로 마치 서울은 전시상태를 방불케 했다.
결국 홍제동 은신처가 발각되자 1월 22일 새벽 5시반경 1000여 명의 일본 경찰이 주위를 에워싼 가운데 특공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3시간에 걸친 총격전으로 일경 15명을 살상했지만 중과부적이었고 탄환도 다했다.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 집으로 피신한 김상옥은 마지막 남은 한발의 총탄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이 무려 11군데나 될 정도로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일제하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 가운데 가장 장렬한 의거였고,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