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이 1945년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 모여 전후처리 문제를 매듭지은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 결과가 12월 27일 AP통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지면서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조선에 임시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고, 이를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최고 5년 기한으로 미·영·소·중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발표를, 국민들이 새로운 굴레를 씌우려는 열강의 음모로 생각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김구와 임시정부계열이 먼저 강한 반발을 보였다. 28일에 긴급 임정 국무회의를 열어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했고 31일에는 수 만 명이 참가한 ‘서울시민반탁대회’를 개최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이승만까지 반탁정국에 뛰어들면서 ‘결사반대’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반탁을 알리는 각종 삐라가 난무했고 곳곳에는 벽보가 붙혀졌다. 신문들도 반탁기사로 넘쳐났다. 하지만 이듬해 1월 2일, 반탁을 주장하던 좌익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돌연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해방 후 친일세력과 민족세력 간의 대립구도가 갑자기 좌우의 대립구도로 바뀌는 예측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좌우의 극단적 편가르기는 중도파들의 설 자리를 빼앗았고, 국내 정세는 극심한 남남갈등의 대결구도로 급속히 재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