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전, 안중근의 이토 저격이 의열투쟁의 정화였다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의 의거는 마지막 귀결이었다. 1904년 나이 18세 때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농부로 일하면서도 이재명의 마음은 언제나 침략 원흉들을 처단하는데 있었다. 1907년 10월 고국으로 돌아와 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재명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09년 1월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 황제의 평안도 순시 때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처단할 생각으로 평양역 부근에서 기다렸으나 자칫하면 이토 옆에 있는 순종 황제까지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이토는 결국 그해 10월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죽임을 당했다. 목표를 잃은 이재명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을 수호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을사오적 처단을 준비했다. 14명의 동지가 이재명과 뜻을 같이했고 이재명은 이완용 처단을 맡았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은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성당 밖에서 이완용을 기다렸다. 손에는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오전 11시쯤 인력거를 탄 이완용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재명은 먼저 인력거꾼의 가슴을 찔러 거꾸러뜨리고는 곧바로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쓰러진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찔렀으나 달려드는 일본 경찰에게 다리를 찔려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애꿎은 인력거꾼만 숨지고 이완용은 살아남아 이듬해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이재명은 이듬해 5월 사형을 선고받아 1910년 9월 30일 24세의 젊은 나이에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