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2월 25일, 25세의 히로히토가 제124대 천황에 즉위했다. 원호(元號)는 ‘쇼와(昭和)’. 히틀러·무솔리니와 함께 2차대전의 3대 전범 중 한사람으로 지목된 히로히토의 전전(戰前) 삶은 일본의 군국주의 팽창사와 궤적을 같이했다. 1901년 태어난 히로히토는 왕이 되기 전부터 군국주의적 교육과 환경 속에서 뼈가 굵었다. 어린시절 다닌 귀족학교 교장부터 러일전쟁의 영웅이자 군국주의자로 유명한 노기 마레스케였다. 노기는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그를 따라 자살한 골수 천황파였다. 히로히토는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노기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군국주의자 히로히토의 얼굴은 종전 후 극적으로 바뀐다. 중국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하고 종전 때까지 전권을 휘둘렀던 ‘현인신(現人神)’이 전전의 모습이라면, 군부의 희생양, 해양생물학자, 타고난 평화주의자는 미화된 전후 모습이다. 이런 변신은 공화당 후보로 차기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려했던 맥아더의 정치욕과 미·소 냉전시대의 개막, 생존을 위한 히로히토의 비굴한 행동에서 비롯됐다. 그가 가장 총애했던 도조 히데키조차 법정에서 “일본 사람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며 천황의 전쟁책임을 암시하는 진실을 토해냈지만 맥아더와 재판관들은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나 2000년 12월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은 히로히토에 대해 “인간의 노예화, 고문, 살인, 인종차별을 비롯한 인도(人道)에 관한 죄를 범했다”고 선고해 상징적으로나마 사후에 단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