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2월 17일, 서울의 우미관 앞은 아침부터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무선전화방송 실험을 보고, 듣고, 느껴보려는 사람들이었다. 1개월 전 총독부 체신국이 한 차례 실험방송을 한 바 있어 ‘민간 최초’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인이 주관했다는 점에서는 ‘국내 최초’가 된다. 무선전화방송은 라디오방송의 옛 표현이므로 이날의 실험은 한국 최초의 민간 라디오방송 실험인 셈이다.
방송 진행자는 한국최초의 여기자인 조선일보의 최은희였고, 처음 전파를 탄 사람은 독립운동가인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었다. 조선일보사에서 쏘아올린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우미관 안에 전달되자 사람들은 신기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영한다. 윤극영씨의 동요 ‘반달’과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가 이어지면서 청중들의 반응도 절정에 달했다. 12월 18일자 조선일보는 ‘경이(驚異)의 눈! 경이의 귀!’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전했다. 둘째 셋째날은 좀더 넓은 경성공회당으로 옮겼지만, 인천·수원·개성 등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차왕래가 중단될 정도였다. 그후 우리나라 최초의 경성방송국이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2년 3개월이 지난 1927년 2월 16일이었다, 미국에서 정시 라디오방송을 시작한지 7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