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발빠르게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개전 하루 만에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1951년 9월, 48개 국 연합국과 일본간의 강화조약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선전포고를 근거로 “우리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조인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임시정부 26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일본의 반대로 조약 참여국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선전포고는 광복군이라는 무장병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광복군은 출범 당시 부대원이 30여 명에 불과했다. 무기도 변변치 않았다. 하지만 점차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과 중국 국민당의 군사원조를 받아 체계를 갖춰갔다. 1943년 8월 13일에는 인도·버마 전선에서 9명의 광복군 공작대가 연합군 일원으로 활약했고, 전쟁 막바지인 1945년 5월부터는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3개월 간 유격전에 필요한 특수훈련을 받으며 한반도 침투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광복군이 조국해방전선에 뛰어들 기회를 날려버렸다. 김구 주석은 그 실망감을 백범일지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현재 대만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일선전포고 원본에는 포고일자가 12월 10일이어서 지금까지 9일과 10일 양론이 분분하지만 광복군동지회는 해마다 12월 9일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