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초가집. 그날 밤 9살의 승복이는 숙제를 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어머니와 형이 있었고, 두 동생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30여 명 가운데 5명이 승복의 집에 들이닥쳤다. 잠시후 한 공비가 승복에게 물었다.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 승복이가 “우리는 북한은 싫어요.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대답하는 순간 승복의 입은 공비가 쑤셔넣은 칼로 인해 입에서 귀까지 찢겨져 나갔다. 공비들은 대검으로 어머니를 찌르고, 두 동생은 벽에다 패대기를 쳤다. 가족 네 사람은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다. 형은 36번의 칼질을 받았으나 요행히 살아났고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다 공비들을 만난 아버지는 대퇴부에 상처를 입고도 탈출하는데 성공,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승복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질 않았다. 1992년 한 자유기고가가 계간지 ‘저널리즘’ 9월호에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비난하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는 글을 쓰면서 겨우 아물어가던 가족의 상처에 또 한 번 비수를 꽂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당시 12월 11일자 신문에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으로 승복이의 죽음을 자세하게 알렸었다.
‘언론개혁시민연대’라는 단체는 1998년 서울과 부산에서 ‘오보 전시회’를 열어 ‘기사가 아닌 소설’이라는 설명을 달아 조선일보의 이승복 보도를 허구·조작·작문으로 몰아갔고, MBC를 비롯한 다른 매체들도 제대로 검증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이승복 오보론’으로 단정지었다. 이들은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 없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2004년 법원(2심)이 ‘이승복군 보도’는 현장 취재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는 판결과 함께 ‘오보 전시회’ 책임자에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이승복 사건 보도가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승복 참살의 의미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