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군대가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아일랜드에 상륙한 것은 1170년이지만, 분쟁의 역사는 16~17세기에 영국이 이곳을 강제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특히 1649년 9월 영국의 크롬웰이 더블린 북쪽 드로이다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4000여 명의 아일랜드 주민을 살해한 사건은 아일랜드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 영국인들은 주로 북아일랜드 지역에 정착했다. 1801년 영국이 아일랜드를 공식 합병하고 이곳에 ‘영국·아일랜드 연합왕국’을 세우면서 아일랜드는 저항과 보복의 악순환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아일랜드에는 독립전쟁이 점화됐고 1916년 4월 ‘아일랜드 의용군’ 1600여명이 일으킨 ‘부활절 봉기’는 그 투쟁의 정점이었다.
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위해 1920년 영국이 아일랜드를 남북으로 분리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아일랜드 전역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 신교도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북아일랜드는 가톨릭만으로 구성된 남아일랜드와의 분리를 원했지만 IRA(아일랜드 공화국군)는 분리반대를 외치며 테러로 맞섰다. 이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20년 11월 21일 영국군이 더블린에서 축구를 관전하고 있는 아일랜드 관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 12명이 죽고 60명이 다친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전날 IRA가 영국 첩보부원 14명을 암살한데 따른 보복이었다.
혼란 속에서도 영국 의회는 아일랜드를 남북으로 분리해 각각 자치 의회를 보장하는 법안을 1920년 12월 23일 통과시켰다. 이에따라 남아일랜드 26개주는 영국 왕실에 충성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1922년 12월 6일에 ‘아일랜드 자유국’을 수립했으나 북아일랜드 6개주는 영국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70여 년 동안 북아일랜드를 혼란으로 몰고갈 유혈분쟁의 씨앗이었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1949년 4월 18일 ‘아일랜드 공화국’을 세워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갔으나 북아일랜드는 그대로 영국령으로 남아 20세기가 다할 때까지 유혈 분쟁지역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