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 구리온 사망

1948년 5월 14일.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결정하고 4개월 반이 지난 이날, 65만 유대인들이 라디오 주위에 모여 있었다. 정각 오후 4시, 국기인 ‘다윗의 별’이 펄럭이는 가운데 그들의 오랜 지도자 벤 구리온의 목소리가 잡음을 뚫고 들려왔다. “이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이 유랑 1900년만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순간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일어나 국가 ‘하티크바(희망)’을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의 오랜 기대는 충족됐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비슷한 시각, 항구도시 하이파에서도 조그만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앨런 커닝엄경이 휘하 부대로부터 경례를 받는 모습이었다. 식이 끝난 뒤 그가 모터보트를 타고 지중해로 빠져나감으로써 31년 간의 영국통치도 막을 내렸다.

신생국의 초대 총리는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다비드 벤 구리온이 맡았다. 1886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20세 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벤 구리온은 이민 초기 수년 동안 농부로 일하며 향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유대인들을 위한 터전 마련에 전념했다. 말라리아와 굶주림 등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는 한 번도 목적의식을 잃지 않았다. 1차대전 때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위험분자로 지목돼 미국으로 추방됐으나 1917년 밸푸어선언이 발표되자 영국군 산하의 유대인 부대에 입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가 할 일은 유대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그는 주요국가에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실천적 시오니스트였다. 최대 관심은 가급적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땅을 개척하고 정주함으로써 그들의 땅으로 기정사실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가는 데는 누구보다 적합한 창의적 지도자였다. 정해진 시간의 정해진 인물이 아니라 계획된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나간 인물이었다. 1973년 12월 1일 그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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