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 출신의 청년들은, 공산주의라면 생리적으로 거부하며 치를 떨었다. 출신지에 따라 평남청년회․함북청년회․황해청년회 등을 결성한 이들은 좌익을 쳐부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1946년 11월 30일에는 서울 YMCA 강당 에서 ‘서북청년회(서청)’로 통합, 세력확대를 꾀했다.
서청의 반공 성향을 포착한 미 군정이 이들을 좌익 공격의 선봉에 세운 탓에 좌익의 준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들이 해결사로 나섰다. 힘을 실어주다보니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고 폐해는 제주도 4․3사태 때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다. 1947년 제주에서 3․1 시위가 일어나자 새로 부임한 도지사가 서청 단원을 경호원으로 데리고 간 것이 제주도와 서청의 첫 만남이었다. 무고한 제주도민과 좌익을 구별해야 했음에도 좌익․도민 가리지 않고 백색테러를 마구 자행하는 바람에 이들 때문에 좌익 쪽을 선택한 도민들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보수없이 경찰 보조역으로 활동해 민폐도 컸다.
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할 때 서청도 이 단체에 가입했으나 이 과정에서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돼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결국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고, 합동반대파는 1년 뒤인 1949년 12월 이승만이 결성한 대한청년단에 대동청년단과 함께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