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유엔총회, 팔레스타인 분할안 채택…유대인들에게는 감격이었으나 아랍인들에게는 깊은 슬픔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국가를 세우려는 시오니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팔레스타인이 화약고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화약에 처음 불을 붙힌 것은 영국이었다. 1차대전 당시 영국은 오스만투르크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유대인과 아랍인 양쪽 모두에 추파를 던졌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고려할 것이라는 ‘밸푸어선언’으로 지지를 끌어냈고, 아랍인들에게는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을 돕겠다며 그들의 지원을 유도했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쟁기간동안 영국을 도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유대인들이 속속 팔레스타인으로 밀려오고 영국의 묵계로 프랑스가 시리아․레바논을 점령하자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에 격분했다. 영국․프랑스 두 강대국을 상대할 수 없었던 아랍인들은 분노를 유대인들에게 돌려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이 더욱 격화되는 가운데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오자 영국은 유대인 이민자수를 7만 5000명으로 제한하며 아랍인들을 달랬다. 전운이 감돌고 있는 2차대전을 치르려면 아랍인들의 도움이 재차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유대인들의 밀입국 러시가 최고조에 달하자 영국은 무력으로 막았고 유대인들은 기습과 테러로 영국에 맞섰다. 결국 시온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과 정책을 완화시키지 말라는 아랍인들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하게 된 영국은 위임통치를 포기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회부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가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으로 팔레스타인 분할안(案)을 가결해 65만 유대인과 110만 아랍인 각각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길을 터주었으나 이는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분쟁의 시작이었다. 1900년 만에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설립하게 된 유대인들에게 이 결정은 감격이었지만 오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아랍인들에게는 깊은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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