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진단학회, 첫 ‘진단학보’ 발간

1934년 5월 7일 오후 5시, 서울 소공동 코라다느 다방에 20여 명의 조선인 학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국과 인근 지역의 문화를 연구할 목적으로 탄생한 ‘진단학회(震檀學會)’를 발기하는 자리였다. 일본인들이 타율성과 정체성을 전제로 한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해 한국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어 우리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할 필요성이 절실한 때였다. 그 당시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술기관은 총독부가 만든 ‘조선사편수회’와 일본인 학자들로 구성된 ‘청구학회’등 뿐이었다. 따라서 우리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려면 일인들의 학술지 ‘청구학총’이나 ‘조선학보’등을 통해야 했다. 게다가 일인 학자들이 원고 내용에 간섭하는 일까지 빈번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우리 학자들이 학회를 만든 것이다.

발기는 이병도가 주도했고 발기인에는 주로 경성제대 출신인 손진태, 조윤제, 고유섭, 이희승 등 당시의 대표적인 국학자 24명이 이름을 올렸다. 당시의 저명인사가 총망라된 거족적인 학문운동이나 다름없었다. 진(震)은 중국의 동쪽, 단(檀)은 단군을 뜻하므로 ‘진단‘은 곧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연구 성과를 담은 ’진단학보‘ 창간호는 그해 11월 28일에 발간됐다. 초대 편집인 겸 발행인은 이병도가 맡았고 한성도서(주)가 발간을 도왔으나 1호 판매가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못미쳐 한성도서가 2호 발간을 중단하는 바람에 2호부터는 회원들 스스로 자금을 조달했다. 이병도는 집을 저당잡혀 비용의 반을 마련했고 윤치호 김성수 등이 찬조금으로 지원했다.

이후 해외의 학회와 학술잡지를 교환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인 이윤재, 이희승 등이 구속되는 바람에 활동을 마감해야 했다. 진단학보도 14호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해방 후 속간된 진단학회의 가장 큰 업적은 미국 록펠러 재단의 도움으로 1959년 발간하기 시작해 1965년에 완간한 ‘한국사’ 전 7권이다. 이 ‘한국사’는 한국 실증사학이 이룩한 연구성과의 총결산이었으며 이후 한국의 역사학은 이 ‘한국사’를 계승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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