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프랑스 파리를 통해서 문 열어
1900년, 묵은 세기에 활약했던 이들이 사라졌는가 하면 새 세기를 자신의 무대로 삼기 위한 탄생이 줄을 이었다. “신은 죽었다”던 프리드리히 니체가 죽고 천재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눈을 감았다. 반면 ‘재즈 황제’ 루이 암스트롱,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 ‘어린 왕자’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태어나 새 세기를 준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박헌영, ‘최초 비행사’ 안창남, 히로히토 천황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이봉창 열사가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갔고, 김동인·주요한·현진건 등 걸출한 문인들이 태어나 20세기 우리 문학의 꽃을 피웠다.
두 세기를 경계 짓는 굵직한 일도 많았다. 중국에서는 의화단 사건으로 청조의 몰락이 가속화되었으며 서양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러시아를 탈출해 스위스로 망명함으로써 17년 뒤에 일어날 볼셰비키혁명을 준비했다. 막스 플랑크가 양자론을 발표해 현대물리학에 혁명을 불러온 것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인류에게 새 지평을 열어줄 ‘꿈의 해석’을 출간한 것도 1900년이었다. 자코모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토스카’가 로마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진 것도, 엔리코 카루소가 밀라노 스칼라좌에 데뷔한 것도 같은 해였다.
1900년, 20세기의 도래를 축하하는 팡파르가 가장 요란하게 울려퍼진 곳은 프랑스의 파리였다. 20세기는 파리를 통해서 문을 열었고 파리는 20세기 초입의 꽃을 피웠다. 파리는 국제적인 박람회와 올림픽을 개최하고 지하철을 개통함으로써 이른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를 구가했다. 스페인 출신의 파블로 피카소가 예술의 도시 파리로 이주한 것도, 훗날 오르세미술관으로 탈바꿈할 오르세역이 건축된 것도 1900년이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인문학 잔치로 꼽히는 세계철학자대회도 그해에 파리에서 개막했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당대 인류 문명의 총결산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20세기의 개벽을 알리는 첫 전령사였다. 그것은 신세기를 맞아 인류가 이뤄낸 과학의 발전과 진보,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만끽하도록 한 당대 인류 문명의 총결산이었다. 그해에 개통한 파리 지하철도 사상 두 번째로 열린 파리 올림픽도 박람회 행사의 일환이었다.
파리 박람회는 1900년 4월 14일 개막했다. 박람회장에는 세계 40개국의 국가관이 세워졌고 11월 12일 폐막할 때까지 5,086만 명이 방문했다. 파리의 밤거리를 밝힌 1만 개의 전등은 20세기가 전기의 시대임을 알려주었다. 19세기 말에 만개하고 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아르누보’ 예술도 곳곳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르누보 양식을 채택한 진열관들은 곡선과 화려한 색채를 조화시킨 건축미를 뽐내고 최신의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은 견고함을 자랑했다. 센강을 가로지르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도 박람회에 맞춰 건설되었다. 고강도의 절삭기 등 기계류는 신세기가 대량 생산 시대임을 예고했다.
파리 박람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세계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사기 시네마토그라프였다. 대형 스크린에서 영화가 상영되자 뤼미에르 형제와 시네마토그라프는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철도 모형 디오라마는 스위스 알프스를 방문하거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중국의 북경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듯한 새로운 경험을 선물했다.
박람회는 기술·과학의 성취만큼이나 미술의 진보를 확인시켜준 대형 이벤트였다. 박람회를 위해 건립된, 길이 200m, 너비 55m나 되는 대형 미술관 ‘그랑 팔레’에서는 1889년부터 1900년까지의 10여 년을 총망라한 ‘프랑스 미술의 10년전’과, 19세기 100년간 미술의 성과를 종합하는 ‘프랑스 미술의 100년전’이 열렸다. 5,000여 점이 출품된 이 미술기획전은 파리 박람회가 사실상 미술박람회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드가,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등의 그림도 관람객에게 미술사조의 새로운 변화를 실감케 했다. 19세의 스페인 청년 피카소는 파리 박람회에 ‘최후의 순간’이라는 작품을 전시하고 파리의 오르세역에 전시된 그림들을 마음껏 감상하면서 세계 미술의 조류를 눈과 머리와 가슴에 담았다. 일본은 동양 국가 중 유일하게 미술관 전시에 참여했다.
세계 박람회 역사… 파리에서 박람회 꽃피워
세계 최초의 박람회는 1851년 5월 1일 영국에서 개막했다. 세계 25개국이 참가한 박람회의 정식 명칭은 ‘만국 산업생산품 대박람회’였다. 전 세계에서 출품한 10만여 점의 전시물은 원료, 기계류, 섬유류, 금속․도자기, 생활용품, 예술품 등 6개 범주로 나누어 30개 전시실에서 진열되었다. 그중에서도 대중의 눈길을 끈 전시물은 새뮤얼 콜트가 제작한 리볼버 권총이었다.
참가국들은 자국의 산업적 현주소를 홍보할 목적으로 참가했지만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영국의 진보와 번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그들의 예상대로 영국은 앞선 기술을 마음껏 과시했다.
무엇보다 관람객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것은 박람회의 대표 전시물로 지어진 수정궁(크리스털 팰리스)이었다. 박람회 개최년도와 같은 1,851피트(564m)의 길이에 폭 124m, 높이 32m로 세워진 수정궁은 돌이나 벽돌 등 전통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3,300개(4,500t)의 강철과 1만 8,000장의 규격 유리(122×30㎝)로만 만들어져 건축공법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온실 기술자 조지프 팩스턴이 설계하고 버밍햄에서 만들어져 런던에서 17주만에 조립되었는데 이처럼 거대 건축이 건립 장소에서 축조되지 않고 먼 곳에서 조립·운반되어 온 것만으로도 건축사에는 일대 혁신이었다. 개장 날에는 무려 25만 명의 관람객이 들어왔는데도 실내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박람회 전시물 중에는 영국이 최초로 개발한 증기기관차도 있었다. 영국 정부는 10월 11일 문을 닫을 때까지 5개월 동안 640만 명이 입장한 것에 한껏 고무되었다. 당시 영국 전체 인구는 2,100만 명이었다.
이후 박람회는 전 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열렸고 그때마다 자국의 기술문명을 상징하고 과시하는 새로운 전시물을 설치했다. 영국에서의 첫 국제박람회 이후 박람회를 꽃피운 곳은 1855~1900년 사이에만 5번이나 박람회를 개최한 프랑스 파리였다.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는 상품에 가격표를 붙이는 행위가 처음 이뤄지고 사진이라는 이름의 특별 전시회가 처음 개최되었다. 1867년 파리 박람회의 최대 구경거리는 14인치 구경(35.6㎝)의 대포였다.
일본이 처음 참가한 것도 1867년 파리 박람회였다. 일본은 박람회를 통해 서구 문명을 수입했으나 반대로 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문화가 서구에 알려지는 효과도 얻었다. 파리는 1878년(1,600만 명)과 1889년(3,200만 명)에도 박람회를 개최했다. 1889년 박람회는 에펠탑 건설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에펠탑은 단순한 철탑이 아니라 만국박람회의 상징이었다. 유럽에서는 런던(1862)과 빈(1873)에서도 박람회가 열렸다.
미국에서는 1876년 필라델피아가 처음 박람회를 열어 전화기, 축음기, 냉장고를 일반에 처음 소개했다. 필라델피아 박람회는 미국 정부의 능력과 힘을 보여준 상징적인 자리였다. 1893년 5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린 시카고 박람회는 ‘화이트 시티’라는 새로운 도시의 전범 즉 시카고식 모델을 창조했다. 이 박람회의 상징물은 기계가 아니라 전기였다. 다이나모 발전기에서 나오는 전기는 시카고 박람회장의 밤을 대낮처럼 밝혔다. 사람들은 생애 처음으로 겪은 전기 야경에 충격을 받았다. 10월 9일의 ‘시카고 데이’에는 75만 명이 일시에 전시장을 방문했는데 인간이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이 모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1970년 오사카 엑스포에서 신칸센 초고속열차를 등장시켜 일본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한국은 대전박람회(1993)에 이어 여수세계박람회(2012)를 개최하고 중국은 2012년 상해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파리 올림픽… 세계 두 번째 올림픽
1896년 그리스의 아테네 올림픽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파리 올림픽은 박람회 열기가 한창 뜨겁게 달아오른 1900년 5월 14일 개막해 10월 28일 폐막했다. 공식 행사명이 ‘파리 만국박람회 부속 국제경기대회’였던 탓인지 진행은 허술했다. 개회식도 폐회식도 없었고 메인스타디움조차 없어 육상경기는 브로뉴 숲 한가운데에 위치한 경마장에서 진행되었다.
파리 올림픽의 스타는 60m 달리기, 110m 허들, 200m 허들, 멀리뛰기 4종목에서 우승함으로서 육상 4관왕에 오른 미국의 앨빈 크랜즐린이었다. 그는 조직위의 준비 부족으로 2년이 지나서야 메달을 받았다. 파리 올림픽은 경기 종목에서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수구와 골프가 처음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줄다리기와 200m 장애물 수영, ‘뒤집어 붙여놓은 배 위로 달리기’라는 황당한 종목도 있었다. ‘비둘기 사격’도 있었는데 비둘기가 300마리나 희생되자 다음 올림픽부터는 살아 있는 비둘기 대신 클레이를 표적으로 사용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여성들은 구경만 할 뿐 선수로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파리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여성 참가”를 외치는 에밀 졸라 등 지식인의 요구가 빗발쳐 24개국 997명의 참가단 가운데 22명이 여성으로 채워졌다. 다만 참가 종목은 테니스와 골프로 한정되었다. 남자 골프는 1904년 올림픽 때도 유지되다가 1908년 대회 때 사라졌으나 여자 골프는 1904년 대회 때 사라졌다가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부활해 한국의 박인비가 우승했다.
경기 일정을 놓고도 주최 측과 미국 선수단 사이에 작은 갈등이 있었다. 미국 선수 중 일부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 경기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주최 측이 경기를 강행해 몇몇 선수는 결국 결승 경기를 포기했다. 메달 집계 결과 미국, 영국, 프랑스가 각각 1위, 2위, 3위를 차지했다.
파리 지하철, ‘땅속으로 가는 기차’에만 그치지 않아
파리 지하철은 1900년 7월 10일 개통했다. 1898년 3월에 시작된 공사는 지상의 교통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지하에 굴을 파고 상부를 보강하는 공법으로 진행되었다. 지하철 개통 후 3량으로 된 전차가 기점에서 종점까지 16개의 지하철역을 지나는 데 33분이 소요되었다. 지하철을 처음 타본 사람들은 20세기가 몰고올 대변화의 한 자락을 경험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땅속으로 가는 기차’에만 그치지 않았다. 지하철 입구와 승강장 등을 화려하게 장식한 ‘전혀 새로운 건축양식과 디자인’이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랑스어로 ‘새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였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곡선과 색채, 회화적 디자인을 아침저녁으로 지하철 입구에서 마주하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아르누보는 전통적 예술과 예술지상주의를 거부하고 자연 형태에서 모티프를 빌려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고 생동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하고자 한 예술양식이었다. 덩굴이나 담쟁이 등의 식물을 연상시키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파상, 곡선 등 특이한 장식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합리성을 소홀히 하고 기능을 무시한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장식에 빠져 10여 년 동안만 전성기를 누리다 사라졌다.
세계 최초 지하철은 1863년 영국 런던
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1863년 1월 10일 영국 런던에서 개통했다. 런던의 패딩턴과 훼링던 간 6㎞를 잇는 구간이다. 지하철이 개통되자 신기한 지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개통 당일에만 4만 명이나 다녀갈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런던에서 지하철 건설 논의가 시작된 것은 1830년대였다. 최고조에 달한 산업혁명의 여파로 하루게 다르게 공장이 늘어나고 있었고, 거리는 지방에서 런던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 사람으로 늘 북적거렸다. 급격한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도시 팽창으로 이동 수단이 절실하던 터에 1836년 런던과 그리니치를 연결하는 첫 여객 철도가 개통되었다. 역들이 런던 외곽에 위치해 있어 역에서 내린 사람들이 시내로 진입하려면 마차를 타거나 걸어야 했던 불편도 새 교통수단을 필요로 했다.
런던시 안팎을 연결하는 지하철 건설이 해결책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공사 비용이 문제였다. 기술의 발전으로 비용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1860년에야 ‘메트로폴리탄 철도 회사’가 공사에 착수해 2년 만에 지하철을 완공했다. 개통 초기에는 증기기관차에서 뿜어나오는 매연이 골칫거리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기기관차가 등장했는데 1890년 11월 4일, 스톡웰과 킹 윌리엄가를 연결하는 ‘시티 앤드 사우스 런던 지하철’이 그것이다.
유럽 대륙에서는 부다페스트(1896), 빈(1898), 파리(1900), 베를린(1902), 함부르크(1906) 순으로 건설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보스턴(1901)과 뉴욕(1904)을 거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1913)까지 진출했다. 아시아에서는 도쿄(1927)가 테이프를 끊었으며 한반도에서는 1973년 평양지하철, 1974년 서울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조선의 박람회 참가
우리나라가 국제박람회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갓, 모시, 돗자리, 가마 등을 출품한 1889년의 파리 박람회로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만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아 공식적인 첫 참가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1893년 5월 1일부터 6개월간 열린 미국 시카고 세계박람회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렸기 때문에 공식명칭이 ‘콜럼비아 세계 박람회’인 시카고 박람회에는 세계 46개국과 미국 내 47개주 등이 참가해 2,70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조선에 시카고 박람회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조선의 참찬관 자격으로 미국에 체류하던 호러스 알렌이었다. 고종은 1893년 1월 알렌에게 ‘명예사무대원’이란 직함을 주며 행사를 총괄하도록 하고, 내무참의 정경원을 출품사무대원으로 임명했다. 정경원은 1893년 2월 관리․통역․국악인으로 구성된 16명의 참가단을 인솔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1893년 4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시카고에 도착했다.
시카고 박람회에서 조선은 ‘제조와 교양관’의 한 구석을 할당받아 전시관을 설치했다. 12㎡ 넓이의 4평도 안되는 곳에 설치된 대한제국관은 6~7간 규모의 전통기와집으로 만들어져 나전칠기, 보료, 방석 등으로 실내를 장식했다. 전시물은 무명천, 발, 커다란 삼태기, 자개장롱, 비단, 병풍, 도자기 같은 것들이었다. 국악인들은 홍의를 입고 조선의 전통음악을 연주했다.
당시 미국에 체류하다가 박람회를 참관한 윤치호는 “다른 나라 전시관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한 조선의 전시실이 가슴이 아팠다”고 일기에 썼다. 미국 뉴욕헤럴드는 “고종이 한국의 폐품들을 헐값에 사서 보냈다”고 비판했다. 윤치호 등 많은 이가 한국이 출품한 물품을 부끄러워한 것과 달리 박람회를 주최한 미국은 한국의 공예품이 훌륭하다며 출품상을 줬다. 또한 국악이 매혹적이었다며 음악상도 수여했다.
전시 물품들은 박람회가 끝난 뒤 시카고 필드미술관, 뉴욕 피바디미술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등에 기증되었다. 이 가운데 29점은 1993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대전 엑스포 때 특별전시되었다. 정경원은 12월 18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우리나라는 1,140달러 어치의 물품을 팔았으며 1,000명에게 명함을 돌렸고 언어 소통에 불편함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특히 팔만대장경, 삼국사기 등 목판인쇄물이 관람객 눈길 끌어
조선은 1900년 개최된 파리 박람회에도 참가했다. 고종은 1898년 5월 샤를 루리나 파리 주재 총영사를 현지 위원장으로, 종2품인 민영찬을 박물사무부원으로 임명해 박람회를 준비토록 했다. 문제는 대한제국관을 지을 자금 부족이었다. 민영찬은 루리나의 주선으로 조선의 광산 채굴권에 관심이 많은 미므렐 백작을 만나 대한제국관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약속받았다.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외젠 페레가 설계한 대한제국관은 파리 박람회장 내 외진 곳 쉬프랑대로에 100평 규모로 지어졌다. 모양은 경복궁 근정전처럼 당당했으며 사각형 건물에 넓은 기와를 얹었다. 악기, 자개공예품, 자수 등 황실 복식, 유기, 비단, 도자기, 금속공예, 금은박세공품 등 수십 점을 전시했다. 특히 팔만대장경, 삼국사기 등 목판인쇄물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 출신 미국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고종 황제의 어진과 민상호의 초상화도 출품되었는데 민상호는 10대 시절 미국에서 6년간 생활하고 1887년 돌아와 탁월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조선 왕실의 외국인 상대 업무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한 사람이다. 1897년 우리나라가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할 때 대표로 활약하고 1900년 우정사업이 통신원으로 개편될 때 초대 총재를 맡았다.
1898년 휴버트 보스가 조선을 방문해 미국공사관에 머물 때, 민상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요청했다. 보스가 유화로 그린 이 초상화를 보고 고종도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이때 보스가 그린 민상호 초상화는 조선에 최초로 소개된 유화였으며 지금까지도 생동감이 넘치는 최고의 초상화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고종의 어진은 대한제국관이 아닌 미국관 내 ‘인종전시’ 부스에서 관람객을 맞았다. 박람회 폐막 후 전시품 중 일부 수공예품은 파리 소재 기메박물관과 국립기술직업전문학교, 파리 음악박물관 등에 기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