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해방은 됐으나 소련의 ‘붉은군대’가 북한에 주둔하고 공산당이 득세하면서 새로운 갈등과 충돌이 발생,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조직적인 반소·반공(反蘇·反共) 봉기가 처음 일어난 곳은 평북 신의주였다. 1945년 11월 21일 신의주 서쪽 약 20㎞ 지점에 위치한 용암포의 구세학교 운동장에서 이 지역 공산당 인민위원회가 주최한 시민대회가 열렸다. 다른 지역에서처럼 이곳의 시민대회도 공산당을 선전하는 자리였지만, 평소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의 횡포에 시달려온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불만스럽기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대회를 이용해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기로 계획한 학생들은 평북 학생자치대 용암포 대표인 수산학교 4학년생 최병학을 축하연사로 내세웠다. 최병학이 기념사를 통해 공산당 훈련소로 사용되고 있는 용암포수산학교의 반환을 요구하고, 용산포 인민위원장 이용흡과 공산당원들의 행패를 폭로규탄하자, 군중과 학생들도 “공산당은 물러가라” “학원의 자유를 인정하라”며 구호를 외쳤다. 시민대회가 삽시간에 공산당 규탄대회로 변한 것이다.
보안대가 제지에 나섰지만 흥분한 군중들을 해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시 후퇴했다가 다시 세를 재정비한 보안대는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발견되기만 하면 무조건 구타하거나 닥치는 대로 검거했다. 이 와중에 30여 명이 부상하고 제1교회 홍석황 장로가 살해됐다. 이 상황이 평북 학생자치대 본부에 전해지자 격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총궐기를 결의했고 11월 23일 오후2시부터 신의주시내 6개 남자중학교 3500여 명이 행동을 개시했다. 평북 인민위원회 보안부와 평북 공산당본부 그리고 신의주 보안서가 그들의 목표였다. 이들이 건물로 진입하려하자 건물을 지키고 있던 보안대와 공산당원들이 따발총과 기관총을 난사해 23명이 숨지고 700여 명이 부상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사건 후에도 검거선풍이 불어 2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체포구금됐으며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도 이때 수감되는 고초를 겪고 단신 월남했다. 우리 정부는 1956년 11월 광주학생의거일인 11월 3일을 ‘학생의날’ 그리고 신의주학생의거일인 11월 2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