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존 F. 케네디 美 대통령 피살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정치 유세를 위해 텍사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1964년 대통령 선거가 채 일년도 남지 않았으나 평소 민권에 관한 입법을 강력히 지지해 온 그의 정치적 입장으로 남부 지역에서의 인기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1월 22일 낮, 케네디는 부인 재클린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남부의 댈러스 도심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12시30분, 갑자기 “오,노!(Oh, No!)”하는 재클린의 비명소리가 마른 하늘을 갈랐다. 총탄이 케네디의 목과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케네디는 피격 즉시 인근 파크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이 최종 확인됨에 따라 린든 존슨 부통령이 오후 2시 38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런데 케네디 미 대통령이 암살되고 이틀이 지난 11월 24일, 암살용의자 오스왈드마저 벌건 대낮에 경찰들이 버젓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에게 피살됨으로써 미 전역을 경악시켰던 케네디 암살사건도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스왈드는 케네디 암살사건 당일, 현장 부근에서 서성거리다 용의자로 체포되어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뒤 군형무소로 옮기기 위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경찰서 지하실을 나오던 중이었다.

이후 배후설과 음모설이 무성하자 존슨 대통령은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법원장 워렌을 위원장으로하는 ‘암살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10개월 뒤 “이 사건은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며, 그를 사살한 루비에게는 어떠한 배후도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여전히 많은 부분이 의혹투성이였다. 정밀조사결과 오스왈드에게는 발포 흔적이 없었고, 조잡한 구식총으로는 80m 떨어진 텍사스 교과서창고 건물 6층에서 단 6초만에 3발을 발사해 이동 중인 케네디를 명중시킨다는 것은 명사수라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구나 체포 초기 12시간 동안의 조사기록까지 사라져 의혹을 부채질했다.

“케네디 미망인의 복수를 갚기위해 살해했다”고 큰 소리친 잭 루비는 “댈라스에서는 나의 목숨이 위험하다”며 워싱턴에서의 조사를 원했지만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 중 1967년에 심한 기침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