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가 인간도살장이이었다면 유대인을 격리·수용하기 위한 ‘게토’는 그 도살장으로 가는 대기실이었다. 1940년 11월 1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게토가 세워졌다. 둘레에는 3m 높이의 콘크리트벽이 쳐져 외부와 차단됐고, 바르샤바 면적의 2.4%에 불과한 4㎢의 공간에는 바르샤바 인구의 30%나 되는 유대인이 감금됐다. 식사량도 독일인 평균(2400kcal)의 10분의 1에도 못미쳐 결국 기아와 질병 등으로 1942년 7월까지 수용인원 50만 명 가운데 12만 명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
1942년 7월22일 이곳에서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목적지는 죽음의 수용소 트레블링카였으나 나치는 휴양소로 보낸다고 선전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해 9월 12일까지 트레블링카로 보내진 약 30만 명의 유대인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곧 그들이 가는 곳이 유대인 절멸수용소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젊은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 당당히 맞서다 죽겠다”며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비밀리에 무기를 확보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게토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SS(친위대)에 내려왔다. 게토에는 7만 명만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1943년 1월 18일 두 번째 강제이주가 시도되자 최초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그들을 수용소로 보내려는 SS 대원을 50명이나 살해했지만 자신들은 1000여 명이나 목숨을 잃어야했다. 1943년 4월 19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SS 대원들이 또 다시 들이닥쳤다. 권총. 수류탄, 화염병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 뿐이었다. 다행히 하수구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폴란드인의 밀고로 살해됐고 일부만이 탈출에 성공, 후일 당시의 참상을 증언했다. 그사이 죽어간 유대인은 1만3000명을 헤아렸다. 5월 16일 현장 지휘관 위르겐 슈트로프가 하인리히 히믈러 SS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저녁 8시15분 상황 종료. 체포되거나 학살된 유대인은 5만6065명. 바르샤바 게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