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최익현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73세로 순국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던 1873년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이미 9일 전인 10월 25일(음력)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1833~1907)이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동묘와 서원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작심 상소였는데 이는 고종에게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회수하라는 요구였다. 7년 전인 1866년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둔 이래 흥선대원군이 시행한 모든 정책을 부정하라는 상소였다.

대원군의 행태까지 낱낱이 고발한 이 상소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 고종의 뜻과도 일치해 고종은 별도의 선언이나 기념식 없이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친대원군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고종 시대를 참판 최익현이 열었다는 점에서 최익현은 킹 메이커였다. 하지만 고종은 조정 대신들이 최익현을 처벌하라는 연이은 상소를 올리자 어쩌지 못해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최익현은 1875년 1월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아니다 싶으면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다. 1876년 1월 병자수호조약을 논의할 때는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도끼와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 상소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났다가 3년간 흑산도에 유배되고 1895년 고종이 단발령을 내렸을 때는 “40년 군신의 의리는 여기서 끝났다”며 당당히 외쳤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섰을 때는 붓을 놓고 칼을 들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후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고 1906년 6월 전북 태인에서 거병했다가 순창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을 때는 “왜놈의 흙을 밟지않겠다”며 부산 초량의 흙을 버선 바닥에 깔았다. 그곳에 가서도 단식으로 저항하다 풍토병에 걸려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타협과 굴절을 거부하고 행동하는 지성으로 일관했던 73년의 삶이었다. 최익현을 가리켜 안중근 의사는 “실로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라 했고,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굴원과 개자추를 합친 절의”라고 격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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