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최익현, 일본 대마도에서 순국…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 없지 않으나 상소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행동하는 지성’

↑ 최익현 초상

 

상소를 올리거나 의병장으로 활약한 ‘행동하는 지성’

조선 말, 더욱 노골화하는 서양 세력과 일본의 침투에 맞서 조선의 관료·지식인들의 대응은 크게 위정척사론, 급진 개화론, 동도서기론으로 나뉘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는 동양의 정신(道)을 근간으로 하고 서양의 기술(器)을 채용해 개화를 이루자는 사상이고,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올바른 것’은 그동안 조선을 지배해온 성리학적 질서이고 ‘사악한 것’은 천주교와 서양의 모든 세력과 문명을 가리켰다.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훗날 많이 제기되었지만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지주이자 실천적 활동가의 대표 인물이 최익현(1833~1907)이다. 그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이면 타협하거나 굴절하지 않고 상소를 올리거나 의병장으로 활약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13살 때 조선 말기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항로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항로 역시 위정척사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최익현은 22살 때인 185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종9품)을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원, 사헌부 장령 등 관직을 두루 거쳤다. 최익현이 상소와 유배로 점철된 삶을 산 것은 30대 중반부터였다. 최익현 상소의 방향과 타당성을 두고 오늘날 이견이 없진 않으나 상소는 최익현식 애국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상소는 최익현식 애국의 또 다른 표현

초기 상소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당시의 실권자 대원군을 겨냥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인 1868년 11월 최익현은 사헌부 장령(감찰 등을 담당하던 벼슬) 자격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한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을 비판하는 상소 ‘시폐사조소’를 올렸다. 하지만 대원군의 위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최익현은 탄핵을 당해 현직에서 물러났다.

최익현은 고종이 즉위하고 10년이 된 1873년에도 두 편의 ‘계유상소’를 올려 여전히 기세등등하던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먼저 올린 것은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당대 실권자인 대원군을 간접 비난하는 10월 25일(음력)의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辭同副承旨疏·사동부승지소)’였다. 조정 대신들이 최익현의 처벌을 청했으나 고종은 상소를 문제 삼지 말도록 지시했다. 최익현은 11월 3일(음력) 또다시 만동묘와 서원의 복구를 청하면서 “많은 폐해가 있으나 전하가 정사를 맡지 않을 때 일어난 일이니 지금부터 임금의 권한을 발휘하라”는 내용의 ‘호조참판을 사직하면서 생각을 밝히는 상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를 올렸다. 이는 1863년 열두 살에 즉위한 고종에게 아버지 대원군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회수하라는 요구였다. 7년 전인 1866년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둔 이래 흥선대원군이 시행한 모든 정책을 부정하라는 상소였다. 이미 여러 차례 올린 상소에 나온 내용이었지만, 이번 상소는 수위가 높았다.

 

잇따른 상소로 대원군 물러났으나 최익현은 제주도로 유배

올린 해의 간지를 따라 ‘계유상소’로 불리는 두 상소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유림의 기반이 뿌리째 뽑힌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이면서 대원군 집정 전반에 대한 반기이고 도전이었다. 대원군의 행태를 낱낱이 고발한 최익현의 상소는 마침 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의중과도 맞아떨어져 고종이 대원군의 세도를 무너뜨리는 데 활용되었다. 하지만 대원군 측 신하들이 “아버지(대원군)와 아들(고종)의 천륜을 이간했다”며 최익현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계속 올리는 바람에 고종도 어쩔 수 없어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대신 친 대원군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교체하고 별도의 선언이나 기념식 없이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이로써 10년 동안 유지되던 대원군의 권력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최익현은 유배 생활 1년 3개월 만인 1875년(고종 12년) 2월 제주도에서 석방되었다. 하지만 조정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협상하자 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1876년 1월 23일(음력)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한다’는 내용의 상소문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疎)’를 올리는 추상같은 모습을 보였다. 임금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자신이 가져온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고 강변한 이른바 ‘도끼 상소’는 죽음을 초월한 강직성과 투철한 애국심의 발로였으나 고종이 1월 27일 ‘(최익현이) 임금을 속이고 핍박하는 말을 만들어 방자하게 규탄했다’며 ‘한 가닥 남은 목숨을 용서하여 흑산도로 유배 보내되, 사흘 길을 하루 만에 걷게 만들라.’는 유배를 명해 최익현은 흑산도로 또다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되었다.

최익현은 가시덤불집을 벗어나 흑산도 곳곳을 유람하며 흔적을 남겼다. 1878년 4월 흑산도 천촌 마을에서는 바위에 ‘중국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봉한 땅이며, 명나라 주원장의 세월’이란 뜻의 ‘箕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 글을 새겼다. 바위에는 주자가 쓴 시에 나오는 ‘지장(指掌)’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에게 기자가 봉한 땅과 주원장이 세운 세월은 벗어나면 큰일 날 프레임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뿌리깊은 사대와 위정척사의 다른 표현이었다.

최익현은 유배 3년 만인 1879년 2월 9일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이후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1894) 등이 연이어 일어나도 1895년까지 20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 최익현은 1894년 7월 갑오개혁 시대 공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김홍집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명을 조작한 것”이라며 거부했다. 최익현이 긴 침묵을 깨고 다시 상소를 올린 것은 62세의 고령이던 1895년 6월이었다. 박영효·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를 처단하고 좁은 소매에 검은 옷으로 바꿔 입은 그들의 의복제도를 원래대로 되돌리게 하라는 상소였다. 그러나 시국은 의복제도를 운운할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896년 1월에 단발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

 

을사조약 후 상소의 한계를 깨닫고 붓 대신 칼 들어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전개되었을 때 고종은 최익현을 의병을 해산시키는 선유대원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최익현은 “원수를 갚겠다는 의병을 내가 어찌 선유하겠는가”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발령에는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1897년 2월 아관파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최익현을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 관찰사 등 요직에 연이어 임명했을 때도 번번이 사직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시정하고 일본을 배격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새로운 도모를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충남 청양으로 이사해 후진 교육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체결을 주도한 박제순·이완용·이근택·이지용·권중현 다섯 매국노의 처단을 주장하는 ‘청토오적소’를 올렸다. 고종을 향해서도 날 선 상소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명나라가 망할 때 의종이 사직을 위해 죽은 의리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의종(숭정제)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자금성 뒷산에서 자결했다. 황제인 고종이 “왜 죽을 각오로 조약을 막지 못했는가” 하고 질타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상소’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나라의 존망이 기로에 선 것이 아니라 사실상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익현은 결국 상소의 한계를 깨닫고 붓 대신 칼을 들기로 했다. 1906년 3월 15일 충남 청양에서 거병을 결의하고 호남으로 출발했다. 그때 나이가 73세였으니 최고령 의병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후학을 양성하다가 거병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이자 전 낙안군수 임병찬의 집이었다. 임병찬은 12년 전, 갑오농민전쟁의 주역이었던 김개남이 1894년 12월 정부군과 일본군에 패해 전북 태인으로 몸음 숨겼을 때 그를 밀고해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이었다. 임병찬이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김개남과 달랐기 때문이다. 임병찬에게 동학군은 임금에게 반기를 든 ‘동학 비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겐 ‘우정’보다 임금에 대한 ‘충’이 먼저였다.

최익현은 1906년 6월 4일 임병찬 등 제자 무리와 함께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병하고 일본의 16가지 죄목을 적은 문서를 만들어 정읍과 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이동했다. 의병이 800명으로 불어나자 순창군수는 최익현 앞에 나아가 항복하고 곡성군수는 의병을 영접했다. 당황한 정부는 남원과 전주진위대에 최익현의 체포와 의병군의 섬멸을 명했다. 의병진이 순창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최익현은 포위망을 좁혀온 군사가 일본군이 아니라 우리 측 진위대임을 알게 되자 한동안 고뇌하다가 6월 12일 “동족끼리 서로 싸우면 안 된다”며 의병 해산을 명했다. 동족의 가슴에 총탄을 쏘느니 차라리 자신이 포로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의병들이 눈물을 머금고 해산한 곳에는 최익현과 임병찬을 포함해 1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단식 후유증으로 순국

결국 최익현과 임병찬은 체포되어 서울에서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본군의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8월 28일(음력 7월 9일) 임병찬과 함께 대마도로 끌려갔으나 “왜놈의 땅을 밟지 않겠다”며 고국에서 신발 속에 가져간 흙 한 줌을 짚신 바닥에 깔고 살았다. 음식도 일본 것이라면 모두 거부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함께 대마도에 갇혔던 제자 임병찬의 ‘대마도일기’에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일본군 대대장이 통역을 통해 관을 벗고 경례를 하라고 했다. 선생이 벗지 않으니 일본인이 다시 말했다.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니 일본 법을 거역하지 말라.” 병정이 칼로 찌르려 하자 선생이 나와서 꾸짖었다. “이놈, 어서 찔러라.” 그런데 대대장이 와서는 “통역이 잘못 전했으니 안심하고 밥을 먹고 나라를 위해 몸을 조심하시라”고 전했다. 이를 선생에게 전하니 죽을 드셨다. 우리 모두 밥을 먹었다. 단식은 사흘 만에 끝났다.’ 요지는 최익현이 일본군 장교의 사과를 받고 사흘만에 단식을 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단식으로 순국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 최근까지도 최익현 단식사로 알려졌다.

대마도로 압송되는 최익현의 모습을 찍은 사진

 

최익현은 단식을 끝냈지만 12월 4일 단식의 후유증으로 풍토병을 얻어 1907년 1월 1일(음력 11월 17일) 대마도 땅에서 눈을 감았다. 보름 남짓 후 시신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백성이 운구 행렬을 뒤따르며 죽음을 애도했다. 유해가 안치된 관은 군중을 뚫고 하루 짧게는 10리씩 길게는 30리씩 겨우 움직여 보름 만에 충남 청양 정산 본가에 도착했다. 유해가 처음 묻힌 곳은 항일 결의를 처음 밝힌 충남 논산 노성면 지경리(옛 노성군 월오동면 지경리) 궐리사 부근 무동산 기슭이었다. 궐리사는 조선 후기 노론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지금 최익현의 무덤은 충남 예산 광시면에 있다. 왜 예산으로 이장했는지 기록은 없다. 다만 배경을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장면이 있다. 대한매일신보에 박영직이라는 노성면 주민이 광고를 실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최익현 선생 묘를 우리 집 선산에 썼기로, 선생의 충절에 어렵게 허락했으나 7개월 연한으로 반드시 이장하시라.’ 이장의 이유가 일본인의 강압인지 허락없이 묘를 쓴 산송(山訟)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최익현은 지금 예산에 잠들어 있다.

충남 예산에 있는 최익현 묘소

 

최익현을 가리켜 안중근 의사는 “실로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이라 했고, 중국의 원세개는 “굴원과 개자추를 합친 절의”라고 격찬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최익현의 기개를 칭송했다. 해방 후 최익현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임병찬은 최익현의 순국 후 1907년 대마도에서 풀려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1910년 망국 후에는 의병전쟁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1914년 다시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거문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916년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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