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근무·철야작업은 예사였고, 만성 위장병과 신경통ㆍ피부병 등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고 시다(보조원)는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사흘밤이나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시다 앞에서 재단사 전태일은 절망감을 느껴야했다.
그 역시 극빈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전태일은 어린 동생을 먹여살리기 위해 신문팔이·구두닦이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평화시장에 들어간 것은 1964년, 16세 때였다. 열악한 노동현실을 자각한 뒤부터는 근로기준법 책을 끼고 살았다. 업주들에게 개선을 요구하고 시청과 노동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싸움도 벌여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무관심과 냉대뿐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 위해 평화시장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는 피맺힌 절규를 쏟아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또 외쳐댔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22세 전태일은 자신을 불태우며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명동 성모병원에서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눈을 감았다.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