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너 루스벨트를 가리켜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이라 했고, 포드 전 대통령의 부인 베티 포드는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강인하고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미 여성들의 화신이었다. 10살 때 고아가 돼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는 운명적으로 ‘루스벨트가(家)의 여성’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삼촌이었고,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먼 친척 오빠였다. 그가 다섯아이를 키우며 내조에 충실하는 동안 남편은 상원의원, 해군성 차관보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현모와 양처를 꿈꿔온 그의 결혼생활은 1918년 남편과 자신의 비서 루시 머서와의 관계를 알게되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이때부터 둘은 평생토록 껍데기만 부부였다. 의례적인 자리 외에는 별거했고, 공식행사가 아니면 식사도 따로 했다. 1921년 루스벨트가 소아마비에 걸리면서 엘리너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남편을 대신할 정치적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이제 독립적인 공인이었고 남편과는 정치적인 동반자였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됐을 때 엘리너는 백악관 생활 첫 해에만 6500㎞를 돌아다니며 남편에게 뉴딜정책의 진척상황을 보고했고, 신문에 칼럼 ‘마이 데이(My Day)’를 쓰며 때로는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고 때로는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정치적으로도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의회에서 증언을 하고, 기자회견을 열고, 전국 당대회에서 연설을 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루스벨트가 또 다른 여성과 사랑을 속삭일 때 엘리너는 AP통신 여기자 로리나 히콕과 동성애에 빠졌다. 1945년 루스벨트가 죽은 뒤에도 그는 미국의 유엔대표로 활약했으며 유엔 인권위 의장으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했다. 1950년대 KKK단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총을 소지한 채 남부를 찾았던 당찬 여성이었다. 1962년 11월 7일, 그가 죽었다. 숨을 거둔 침대 곁에는 버지니아 무어의 시 ‘프시케’가 놓여있었고 시에는 ‘1918’이 쓰여있었다. 엘리너가 남편의 외도를 알았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