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출간

세기가 저물어가던 1899년 11월 4일, 3년에 걸친 고통스런 연구의 산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간됐지만 이 생소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드물었다. 출간 2년이 지나도록 350여 권 밖에 팔리지 않았고 8년이 지나서야 겨우 초판 600부가 소화될 정도였다. 그러나 엄청난 충격파를 예상한 출판사가 발행연도를 신세기의 개막에 맞춰 1900년으로 삼은 덕에 ‘꿈의 해석’은 20세기를 열어젖힌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그때만 해도 ‘꿈의 해석’이 인류역사상 어떤 정치적 혁명 못지않게 인류사에 엄청난 변혁을 몰고올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전통의 가치와 인습을 과감히 무너뜨린 그의 주변으로 알프레드 아들러, 칼 융 등 당대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1908년 4월 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의를 열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래도 일반인들에게 억압된 욕망, 아동의 성욕, 거세된 공포 등은 여전히 낯설었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제자들도 ‘꿈’이야말로 정신분석의 가장 확실한 기초이고 모든 영역에 자신의 이론을 보편화시킬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외고집에 헌신적인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차대전이 끝난 뒤였다. 참호전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흔히 ‘포탄 쇼크’로 불리는 스트레스성 정신장애로 전쟁 후에도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자 1920년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어느덧 지식인이나 예술가들도 알게 모르게 자신이 프로이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마치 초창기 종교처럼 빠르게 확산되고 전파됐으나 실증주의자들은 “유사종교만큼이나 무가치한 사이비 과학”이라며 폄하했다. 추종하든 반대하든 프로이트는 20세기를 관통한 최대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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