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에서 신문이 들어오고 부산에서는 일본인이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을 때, 수신사로 일본 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박영효가 고종에게 신문발간을 진언하면서 조선에도 비로소 신문발간 바람이 불었다. 고종이 1883년 2월 한성부에 신문발간을 지시하자 박영효는 실무를 유길준에 맡겼다.
유길준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천거한 3명의 일본인과 함께 귀국, 신문발간을 준비했으나 곧 박영효가 한성부 판윤을 그만두고 그 자신도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발간작업은 자연스럽게 연기됐다. 얼마후 김윤식·김만식 등 온건 개화파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집권층 역시 자신들의 홍보수단으로 신문발간을 지원했다. 8월에는 신문을 발간할 박문국이 설치됐다.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첫 호를 냈다. 개화파가 주도했기 때문에 개화를 소개하는 신문과 관보(官報)가 혼합된 형태였다. 한성순보가 일본과의 긴밀한 유대 속에 발행되면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청은 제10호에 실린 기사를 문제삼아 조선에 항의공문을 보냈다. 이때문에 혼자 조선에 남아 발간을 도왔던 이노우에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순한문이었던 탓에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이듬해 12월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에 탈 때까지 열흘에 한 번씩 꾸준히 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