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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③-6]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과 배신,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끝

↑  김일성이 정전협정을 체결한 다음날인 1953년 7월 28일 평양의 군중대회에서 전승축하연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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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6·25전쟁 후 김일성의 대숙청과 박헌영의 죽음

 

▲6·25전쟁 실패 책임 전가 위해 1차 대숙청 벌여

김일성에게 1950년대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자신의 오판으로 6·25전쟁을 일으켰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압록강까지 쫓겨났다가 중공군의 참전 덕에 겨우 기사회생한 그로서는 자리 보전을 위해 누군가에게 전쟁 실패의 책임을 전가해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1차 대숙청이었다.

6·25 개전 당시 북한의 최고 지위는 김일성의 차지였지만 빨치산파(갑산파),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 등이 여전히 건재해 네 파벌이 적당히 균형을 이뤘다. 빨치산파는 김일성을 포함한 항일유격대 출신이었고, 국내파는 남로당계가 주축이었다. 소련파는 소련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았으며 연안파는 중국 공산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연안파의 리더는 한글학자이면서도 연안에서 활동한 김두봉이었다.

 

첫 표적은 연안파의 무정과 소련파의 허가위

김일성의 1차 표적은 연안파의 거두 무정이었다. 전쟁 전, 무정은 중공의 팔로군에서 무공을 날렸기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 때문에 오히려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 권력 핵심에 진입하지 못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1946.2), 포병 담당 부사령관(1946.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1948.3) 등 한직을 맴돌았다.

1950년 6·25 전쟁 때는 제2군단장으로 출전하고 9월 총퇴각 때는 수도(평양)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말 압록강변 만포 별오리에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으로부터 군벌주의자, 도피주의자, 살인자라는 비판을 받고 군직을 박탈당하고 숙청되었다. 같은 연안파 거두인 김두봉과는 달리 입북 이후 남다른 정치적 야심을 불태우며 독자적으로 정치적 활로를 모색했던 행동이 김일성의 심기를 자극했던 것이다.

그때의 심경을 김일성은 사후인 1998년 평양에서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무정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도 무력 건설에 참가하여 공로도 세웠지만 워낙 군벌 관료기가 심한 사람이어서 조국 해방전쟁 때에 비판을 받고 군직을 다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장례식을 잘해주었다”며 적절한 대우를 해준 것으로 자평했다. 한동안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 알게 된 북한의 애국열사릉을 통해 1951년 8월 9일 숨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정에 이어 다음 표적은 소련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당중앙위 비서 허가이였다. 그는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1951년 11월 당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아 비서직에서 해임되고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물러났다가 1953년 7월 당 정치위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이승엽과 이강국 등 남로당 출신 핵심 간부 12명이 반국가 반혁명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그중 10명이 1953년 8월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역시 ‘미제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1955년 12월 마지막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56년 7월 19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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