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③-6]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과 배신,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끝
2019년 10월 22일 · zznz

↑ 김일성이 정전협정을 체결한 다음날인 1953년 7월 28일 평양의 군중대회에서 전승축하연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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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6·25전쟁 후 김일성의 대숙청과 박헌영의 죽음
▲6·25전쟁 실패 책임 전가 위해 1차 대숙청 벌여
김일성에게 1950년대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자신의 오판으로 6·25전쟁을 일으켰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압록강까지 쫓겨났다가 중공군의 참전 덕에 겨우 기사회생한 그로서는 자리 보전을 위해 누군가에게 전쟁 실패의 책임을 전가해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1차 대숙청이었다.

6·25 개전 당시 북한의 최고 지위는 김일성의 차지였지만 빨치산파(갑산파),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 등이 여전히 건재해 네 파벌이 적당히 균형을 이뤘다. 빨치산파는 김일성을 포함한 항일유격대 출신이었고, 국내파는 남로당계가 주축이었다. 소련파는 소련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았으며 연안파는 중국 공산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연안파의 리더는 한글학자이면서도 연안에서 활동한 김두봉이었다.
첫 표적은 연안파의 무정과 소련파의 허가위
김일성의 1차 표적은 연안파의 거두 무정이었다. 전쟁 전, 무정은 중공의 팔로군에서 무공을 날렸기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 때문에 오히려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 권력 핵심에 진입하지 못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1946.2), 포병 담당 부사령관(1946.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1948.3) 등 한직을 맴돌았다.

1950년 6·25 전쟁 때는 제2군단장으로 출전하고 9월 총퇴각 때는 수도(평양)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말 압록강변 만포 별오리에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으로부터 군벌주의자, 도피주의자, 살인자라는 비판을 받고 군직을 박탈당하고 숙청되었다. 같은 연안파 거두인 김두봉과는 달리 입북 이후 남다른 정치적 야심을 불태우며 독자적으로 정치적 활로를 모색했던 행동이 김일성의 심기를 자극했던 것이다.
그때의 심경을 김일성은 사후인 1998년 평양에서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무정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도 무력 건설에 참가하여 공로도 세웠지만 워낙 군벌 관료기가 심한 사람이어서 조국 해방전쟁 때에 비판을 받고 군직을 다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장례식을 잘해주었다”며 적절한 대우를 해준 것으로 자평했다. 한동안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 알게 된 북한의 애국열사릉을 통해 1951년 8월 9일 숨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정에 이어 다음 표적은 소련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당중앙위 비서 허가이였다. 그는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1951년 11월 당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아 비서직에서 해임되고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물러났다가 1953년 7월 당 정치위 출석 요구를 거부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이승엽과 이강국 등 남로당 출신 핵심 간부 12명이 반국가 반혁명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그중 10명이 1953년 8월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역시 ‘미제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1955년 12월 마지막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56년 7월 19일 처형되었다.

▲김일성,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입지 굳혀
이처럼 1차 대숙청을 성공시켜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입지를 더욱 굳히기 위해 1956년 2차 대숙청을 감행했다. 2차 대숙청은 김일성이 먼저 시동을 걸진 않았다. 위기를 감지한 소련파와 연안파가 먼저 도전해옴으로써 자연스럽게 권력투쟁과 대숙청으로 이어졌다.
2차 대숙청은 이른바 ‘8월 종파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북한에서 ‘종파’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당에 도전하여 당의 노선과 정책을 무턱대고 반대하는 무리’를 가리킨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동유럽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확산하자 여파가 북한에까지 미쳤다.
김일성이 전후 복구를 위해 중공업 우선론과 농업 집단화를 펼쳤을 때 연안파와 소련파는 “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경공업을 중시하고 사회주의 개조는 천천히 하자”며 반대했다. 또한 “권력구조와 정책결정 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인민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안파의 최창익과 윤공흠, 소련파의 박창옥 등이 주축을 이룬 이들 연합 세력은 김일성을 권좌에서 밀어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거사는 김일성이 1956년 6월부터 50여 일간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과 동구권을 방문할 때 추진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쿠데타 시도 음모를 전해 듣고 급거 귀국해 반격을 준비했다. 그런데도 반대파들은 8월 2일로 계획되어 있던 중앙위를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자 강행하지 못하고 8월 30일로 연기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반대파들의 비판, 김일성의 조직적 반격을 자초해
반대파들은 김일성이 어떤 반격 카드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고 8월 30일 평양예술극장에서 열린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개인 독재를 버리고 모든 당 기관을 집체적 지도체제로 개편해야 한다” “중공업정책이 과도하다”며 김일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중앙위원 대부분이 이미 김일성 세력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이들의 발언은 김일성파의 조직적인 반격을 자초할 뿐이었다. 다음날 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은 당직을 박탈당했다. 윤공흠은 감시 소홀을 틈타 중국으로 달아났다.
8월 전원회의는 북조선 정부 수립 후 공식 석상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노선싸움이었고 연안파와 소련파가 손잡고 김일성의 빨치산파를 상대로 벌인 회의장 쿠데타였다. 1라운드는 이렇게 김일성의 승리로 끝났으나 소련과 중국이 각각 미코얀 부수상과 팽덕회 국방부장을 평양에 파견,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9월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다시 소집해 ‘8월 결정’이 신중치 않았음을 시인하고 출당자들을 복당시켰다. 김일성에게는 두 번째 위기였으나 미코얀과 팽덕회가 평양을 떠나는 순간 또다시 역습을 감행했다. 당시 소련과 중국은 자국 내 문제로 평양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 중국과 소련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면서 양국은 서로 김일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8월 종파 사건’, 김일성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
김일성은 이 같은 국제정세를 이용해 반대파들을 반당 반혁명 등으로 몰아세워 1958년 초까지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벌였다. 최창익과 박창옥 등은 국가반란음모죄라는 죄목을 씌워 1957년 숙청하고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은 1958년 쫓아냈다.

1957년 9월 김일성은 새 내각을 발표했다. 연안파의 최창익과 소련파의 박창옥 이름은 사라지고 허정숙이 사법상으로 영전했다. ‘8월 종파 사건’이 이처럼 김일성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 것은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충분한 사전 준비 없이 외세의 도움을 빌려 권력에 도전하려 한 반대파의 무모함도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반대파의 섣부른 도전으로 오히려 김일성의 권력만 강화해준 꼴이 되었다.
1958년 3월, 김일성이 제1회 당대표자회의에서 “조선노동당에서 종파가 완전히 청산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8월 종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자주노선을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유일 지도체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김일성과 함께 1930년대 무장투쟁을 전개한 빨치산파(갑산파)는 ‘8월 종파 사건’ 때는 위기를 넘겼으나 1967년 김일성 개인숭배가 노골화하고 1인 절대권력 체제가 확립되는 일대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 숙청되었다. ‘8월 종파 사건’은 김일성 집권사에서 최대 위기로 일컬어지는 권력투쟁 사건이었고 북한 역사에서 유일한 조직적인 반김일성 운동이었다.
▲박헌영과 주세죽의 최후
일본의 패전 후인 1946년 5월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살고 있던 주세죽은 “나는 박헌영의 아내이니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소련 정부에 청원서를 보냈으나 1948년 1월 거절당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 무렵 딸 비비안나는 체코 프라하의 세계청년학생 무용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탄 이래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으로 해외공연을 다녔다. 1949년 8월에는 모이세예프무용단의 일원으로 평양에서도 공연을 했다. 박헌영과 허정숙도 공연을 관람했다.

주세죽은 1953년 말 소련의 프라우다지 보도를 통해 박헌영이 실각된 것을 알고 혹시라도 딸 비비안나에게 위해가 가해질 것이 걱정되어 딸이 있는 모스크바로 향했다가 폐렴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딸은 지방공연 중이어서 사위가 임종을 지켰다. 1989년 3월 소련에서 명예가 회복되고 유해는 모스크바 시내 한 러시아 정교회 수도원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 애족장(7등급 가운데 5등급)을 받았다.
박헌영은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1953년 3월 체포되어 1955년 12월 15일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사형 및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6년 7월 19일 밤 어느 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시신은 그 자리에 묻혔다. 처형 직전, 박헌영은 북한에서 재혼한 아내와 두 어린 자식의 후사를 부탁했다.

박헌영이 살아 생전 동거하거나 결혼했던 여성과 자식들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와 육신의 정을 나눈 여성은 주세죽, 정순녀, 이순금, 윤레나(윤옥) 4명이고 피붙이는 4명이다. 2세는 주세죽이 낳은 박비비안나, 정순년이 낳은 박병삼(원경 스님), 윤레나가 낳은 2명이다. 이 가운데 이복형제인 박비비안나와 원경은 1991년 10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처음 대면했다. 당시 비비안나는 64세, 원경은 51세였다. 두 사람은 2개월 뒤 한국에서도 만나 아버지의 고향을 둘러보았다. 윤레나가 낳은 2명의 자식은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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