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중국 공산당, 김산 처형 결정

김산(본명 장지락)은 혁명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사상가였고 무정부주의자였다. 1905년 평양 근교 용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그들의 만행을 확인하고는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젊은 항일 급진주의자와 접촉하면서 지하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특히 금강산 승려 출신 김충창의 지도로 무정부주의자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그는 1925년 중국 혁명에 본격 뛰어들었다.

1927년 12월 광동코뮌에 참가했으나 공산당이 패배하는 바람에 1928년 9월 천신만고 끝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곧 베이징으로 갔으나 1930년 11월 장제스의 비밀경찰에 체포돼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됐다가 이듬해 4월 풀려나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1933년 또 체포됐으나 역시 이듬해 풀려났다. 그러나 이 구금기간이 예상보다 짧은 탓에 중국의 공산당 간부들은 그를 일본 간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김산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지만 당내 권력싸움에 빠져있는 그들의 귀에 변방 출신 김산의 호소가 들릴 리 없었다. 결국 김산은 트로츠키파 축출을 위한 이른바 ‘서간공작’에 휘말려 어이없는 죽임을 당해야 했다. 1938년 10월 19일 김산의 행적을 심사한 중국 공산당은 “완전히 조사할 수 없는 형편에서 ‘일본간첩’으로 처형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 후 김산은 전선으로 가는 도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처형됐다.

철저히 가려질 뻔 했던 전설적인 항일영웅의 행적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김산이 1937년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와 화학 등을 가르칠 무렵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의 부인이자 신문기자였던 님 웨일즈를 만나면서였다. 김산은 3개월 간 20회의 구술을 통해 신비와 고뇌에 찬 자신의 짧은 생애를 밝혔고, 님 웨일즈는 ‘아리랑(Song of Arirang)’이라는 제목의 책을 1941년 뉴욕에서 출간했다. 간결하고 신념에 찬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4년 동녁출판사가 번역본을 내면서였다. 1983년 중국 공산당이 ‘김산에게 덮어씌운 누명을 벗기고 명예와 당적을 회복시킨다’고 선포함으로써 김산은 45년 만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고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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