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져서 어두운데…”(고향생각) “오가며 그집 앞을 지나노라면…”(그집앞) “배를 저어가자 험한…”(희망의 나라로).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곡을 작곡한 현제명이 1960년 10월 16일, 향년 58세로 숨을 거뒀다. 그는 홍난파와 더불어 서양음악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제1세대 음악인이었다. 홍난파가 광복 이전 근대 음악계의 대부였다면 현제명은 현대까지도 아우른 우리 음악계의 큰 별이었다.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고 미국 유학과 친일 경력까지 닮은꼴이었던 홍난파가 일제 하인 1941년에 죽으면서 그 자리는 현제명의 몫이었다.
현제명이 일제 하에서 친일 활동을 펼친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진정한 공로는 광복 후 한국에 현대음악의 뿌리를 내린데 있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5년 간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와 연희전문 영어교수로 부임한 현제명은 귀국 초기에는 독창회를 갖거나 가곡 등을 취입하는 등 주로 성악 활동에 전념하다가 곧 작곡과 음악행정에만 전념했다. 나라가 없던 망국의 시대를 살다보니 그의 음악 활동은 모두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를 창립한 것도, 조선문예회(1937년)와 조선음악협회(1941년)에 가입한 것도, 음악보국을 목적으로 한 경성후생실내악단을 결성(1942년)하고 이 악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것도 모두 친일적이었다.
그럼에도 ‘친일’로만 낙인찍기에는 그가 광복 후 우리 음악계에 끼친 공로가 너무 크다. 그 시대를 살던 다른 많은 엘리트처럼 일제 하와 광복 후의 그의 역할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광복 후 현제명은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설립하고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단, 척박했던 우리 음악계에 큰 공적을 남겼다. 서울오페라단을 창단하고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총지휘한 것도 현제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