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으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태어난 것 부터가 굴곡진 삶의 시작이었다. 3류 가수였던 어머니는 그를 낳은지 두달만에 사라졌고 무능했던 곡예사 아버지는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세 살때 걸린 각막염으로 몇 년 동안은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10대 때 낳은 딸은 두 살에 죽었다.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불행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술주정뱅이 외할머니와 매음굴을 운영하는 친할머니 집을 전전하며 노래 몇 곡에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던 에디트 피아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세 때였다.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란 이름으로 카바레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작고 초라한 외모였으나 청중은 상처받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노래에 매료됐다. ‘샹송의 여왕’을 향한 출발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을 꿈꿨다. 그러나 사랑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그는 슬픔을 노래로 달랬다. 그의 삶은 자신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는 여정이었다. 비록 기혼남이었지만 헤비급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이야 말로 그가 느꼈던 진정한 첫 사랑이었다. 그러나 세르당 마저 비행기 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버리자 죽은 연인을 위해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찬가’였다.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은 ‘장밋빛 인생’으로 노래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그의 노래는 언제나 사랑의 상처로부터 울려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잇따른 자동차사고와 마약중독은 서서히 그의 몸을 망가뜨려 결국 1963년 10월 11일 오전8시40분, 48세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그의 평생의 친구였던 시인 장 콕토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조금전 피아프의 죽음에 “그녀는 방랑의 여로를 다한 배”라는 애도의 말을 남겼던 콕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