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을 가장 크게 변화시켰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중심에는 교황 요한 23세가 있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면 가톨릭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는 게 평소 교황이 품어온 생각이었다. 1958년, 77세의 노쇠한 나이로 ‘신의 대리인’이 된 요한 23세는 곧 가톨릭 최고회의 ‘공의회(公議會)’를 소집했다. 변화는 곧 교회의 신성한 전통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측근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교황은 마치 ‘변화’와 ‘쇄신’이 그에게 주어진 소명인 양 공의회를 밀어부쳤다.
1962년 10월 11일, 교황의 부름을 받은 전 세계 2500여 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로마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모였다. 1869년의 제1회 공의회 후 93년만이었다. 첫 한국인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진보·보수 양파가 격론하고 대립했으나 이듬해 6월 요한 23세가 세상을 떠나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바오로 6세가 취임하면서 공의회는 중대 고비를 맞는 듯 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물꼬는 이미 강물로 내쳐 달리고 있었다. 4년 간의 논의를 거쳐 1965년 12월 8일 폐회될 때까지 공의회는 16개 문서를 통과시켰다. 각국의 고유한 전통과 관습에 맞게 전례를 허용하고, 적대해온 유대교와 개신교·정교회 등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자는 결의였다. 한국 가톨릭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미사 때 라틴어 대신 한국어를 대폭 사용할 수 있게 됐고, 무릎을 꿇는 의식인 ‘장궤’가 ‘절’로 바뀌었으며 교리문답이 간소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