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 청조의 몰락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그저 연명할 따름이었다. 1911년 10월 10일, 양쯔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우창(武昌)에서 혁명파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신해혁명’의 불길이 솟아오른 것이다. 이튿날 혁명군이 우창·한커우(漢口)·한양(漢陽)의 우한(武漢) 3진까지 장악, 혁명의 봉화를 지피자 중국 전역은 혁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청조는 1개월 만에 12개 성이 혁명 진영에 가담하자 베이징 군벌 위안스카이(원세개)를 총리로 임명, 진압에 나섰다. 위안은 한커우와 한양을 탈환했으나 곧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주겠다는 혁명군의 제의를 받은 마당에 굳이 승산도 불투명한 내전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명군도 힘의 열세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수립이 선포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지만 쑨원은 3월 11일 위안에게 대총통직을 이양했다. 이미 2월 12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직을 내놓아 268년 간에 걸친 청조와 수천년 간 이어져온 왕조 지배체제가 무너진 뒤였다. 혁명은 국민의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아 미완의 혁명으로 끝이 났지만 대만인들은 이 날을 중요한 경축일인 ‘쌍십절’로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