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은 나비 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한 줄의 논문을 쓰기위해 3만 마리의 나비를 만지고, 6·25때는 15만 마리의 나비를 지키기 위해 피난도 하지 않고 남산 국립과학박물관을 지켰다. 생전에 그가 정리한 한국산 나비는 모두 246종. 53년이 지난 현재까지 밝혀진 나비가 모두 251종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연구 성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시절에는 10년 간 재직하며 60만 마리의 나비표본을 채집해 한 일본신문이 “대영박물관보다 더 많은 세계 제일”이라고 기사화할 정도였다.
평생을 산과 들에서 보내며 75만 개체의 나비를 직접 채집·조사·분류해 한국 나비학의 초석을 세운 그의 공적은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통용되는 유리창나비의 아종명(亞種名)에 그의 성을 딴 ‘SEUK’으로 남아있다. 그는 제주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2년 간 머물렀던 인연으로 제주도에 관한 10권의 저서와 30편의 논문을 펴내고 유채꽃을 일본에서 제주도로 들여왔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 1950년 10월 6일 오후3시, 서울 충무로4가 개천가에서 술을 마시던 청년들이 그를 인민군으로 오인해 총을 쏜 것이다. 석주명은 이렇게 42세로 비명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