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군이 한인을 무참히 살해한 ‘경신참변’ 시작

3·1운동 후 간도는 독립군들의 거점이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전투력을 갖추게 되자 수시로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했다. 압록·두만강을 넘어와 낮에는 산악지대나 밀림지대에 잠복했다가 밤이 되면 일제의 주요 기관을 습격하는 방법으로 일제를 괴롭혔다. 일경 통계에 따르면 1920년 한해에만 총 1651회나 독립군들이 국내 진입 유격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입 작전을 가장 활발하게 펼친 독립군은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이었다. 이들은 1919년 여름부터 함경도의 갑산·강계·온성 등에 진입, 일제 주재소나 헌병감시소를 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하지 않고서는 조선을 완전히 식민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해 만사를 제쳐두고 독립군 토벌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 구체안이 8월 작성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計劃)’이었다. 토벌을 준비하던 1920년 9월 12일 중국 마적단이 훈춘(琿春)시가를 습격, 수십명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살해했다. 10월 2일 새벽에는 중국 마적단이 다시 훈춘을 습격, 일본영사관과 상가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13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그러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피해 상황을 알리는데 열을 올렸다.

중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한 마적단에 러시아인 일부가 가담하고 한인은 1명 혹은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일제는 장차 일본의 간도침입 명분을 살리고 조선 독립군을 소탕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피해를 적극 선전했다. 일제는 훈춘 사건을 구실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제19사단을 간도로 출병했다. 시베리아와 북만주 쪽에서도 군대를 파견해 간도 지역에 모인 일본군만도 2만 여명에 달했다. 이들의 초토전으로 조선인 마을은 모조리 파괴되거나 불태워졌다. 이후 3개월에 걸친 간도지방 한인에 대한 대살육으로 조선인의 피가 강물을 이뤘다. ‘경신참변’으로 불리는 일제의 무차별 학살로 37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이국 땅에서 죽어갔고 50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가옥은 3300여 채나 불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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