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휴전협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이승만 대통령의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휴전회담을 깨고 북진통일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가급적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미국으로부터 휴전반대를 무기로 분명한 안보공약을 얻어낼 것인지…. 단독으로 북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이승만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안전보장이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미국도 안보공약의 필요성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전쟁 위험이 상존하는 이 지역에 발이 묶일 것을 경계했다.
미국 손에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유엔사령부 산하의 군사정부를 세우는 안, 유엔사령부를 한국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하는 안,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하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안 이렇게 3장의 카드가 놓여있었다. 그즈음 미국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휴전협정 체결을 늦춰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고단수 전략이었다.
당황한 미국은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급파, 14차례의 회담을 갖고 이 대통령과 의견을 좁혀나갔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까지 달려와 최종안을 조율했다. 마침내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 워싱턴에서 조인됐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200만 달러 상당의 경제원조를 제공받고 한국군 20개 사단 병력을 증강한다는 계획을 승인받은데 비해 미국이 얻은 것은 이승만이 작성한 ‘휴전 불방해’ 친서 한 장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