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60년대 한국 지성의 산실이었던 월간지 ‘사상계’는 장준하가 광복군 시절 등사판 잡지 ‘제단’을 만든 경험을 살려 1953년 4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 ‘사상’을 인수해 이름을 ‘사상계’로 바꾸면서 세상에 태어났다. ‘사상계’는 자유와 민권을 기치로 내세웠다. 정치 탄압을 받을수록 더욱 성장하는 저력을 보였다. 1958년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이 필화사건으로 비화되었을 때는 독자들의 성원으로 발행부수가 5만 부를 넘어서기도 했다.
5·16후 ‘사상계’는 박정희와 정면으로 맞선다. 군정연장과 한일 굴욕외교에 대한 ‘사상계’의 맹렬한 비판은 박 대통령의 조직적 탄압을 불렀지만 그렇다고 저항과 비판의 기세를 누그러뜨릴 ‘사상계’가 아니었다. 정부의 압력으로 전국 서점에서 반품된 잡지들이 편집실에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사상계’는 의연하게 버텨냈다. 발행인 연행, 판매봉쇄, 세무사찰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던 사상계가 1970년 5월, 205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이 중단된 것은 실로 어이없는 이유에서 비롯됐다.
5월호에 게재된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문제가 되어 사장 부완혁과 편집인 김승균이 구속된 틈을 타 문화공보부가 폐간의 칼을 들이댄 것이다.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할 경우 인쇄소의 책임자를 인쇄인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사상계가 이 규정을 어겼다”는 게 1970년 9월 29일 ‘사상계’에 통고된 폐간이유였다. 폐간 후 사상계는 부완혁의 법적 투쟁을 통해 1972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받아내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1998년이 되어서야 206호를 냈고 그나마 재정난으로 2년에 한 번씩 발간되다가 완전히 종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