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에 위치한 한센병 환자수용소 ‘애양원’에서 헌신적인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펼치던 손양원 목사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1940년 9월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끌려간 것이다. 3년의 형기를 마쳤음에도 일제는 “덴코(轉向)하라”며 위협했고, 손 목사는 “신코(信仰)가 중요하다”며 협박을 거부했다. 결국 광복이 되어서야 풀려났으나 기쁨도 잠시뿐 곧 극심한 좌우대립이 그의 아들들에게까지 손길을 뻗쳤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으로 두 아들이 목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좌익에 끌려가 피살된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그는 총살형에 처한 범인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목회자로 키우는 놀라운 사랑의 힘을 보였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던가. 이번에는 총부리가 손 목사를 직접 겨냥했다. 6·25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데도 “1000명이나 되는 애양원 양떼는 누가 돌보냐”며 피란을 거부하다 결국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렀다.